허약체질 후지산 등반기 1편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어차피 내려올 걸 알면서도 뭐하러 그렇게 높이 오를까. 이 것은 내 문장이 아니다. 장기하의 노래 <등산은 왜 하는 걸까>의 가사에서 훔쳐왔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가사다. 그렇다면 여행을 왜 하는 걸까. '어차피 돌아올 걸 알면서 뭐하러 그렇게 여행을 갈까'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바보 취급을 받을 거다. 여행이 '돌아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듯 등산 또한 '돌아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차라리 제목이 <마라톤은 왜 하는 걸까>였다면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을 것이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할 거 아닌가.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나는 산의 정상이 좋아서 오른다. 정상에 오르면 '드디어 올랐다.'라는 일종의 정복감이 느껴진다. 오른 정상에서 산 아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초라함이 느껴지면서 삶의 어떤 일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힘든 일이든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이 외에도 등산의 매력은 넘친다.
나는 2015년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 후지산에 올랐다. 후지산은 해발 3,776m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 해발이 1,947m인 것에 비하면 후지산은 정말 높은 산이다. 후지산의 높이를 보는 순간 마라톤을 완주하고자 마음을 품었던 순간처럼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가슴속 '가오충'이 깨어났다. 3,776m 등반 성공, 얼마나 멋진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휴가 때 뭐하셨어요?"
"후지산 다녀왔어요."
키야 멋지다, 멋져. 후지산 대신에 에베레스트가 들어가면 더 폼나겠지만 에베레스트는 갔다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다음으로 미뤘다.
2017년 여름 나는 4박 5일 일정으로 시즈오카로 떠났다. 후지산 여행을 위해 난 딱 두 가지만 준비했다. 첫째, 시즈오카로 비행 편을 예매했다. 둘째, 고텐바 코스로 등반하고 후지노미야 코스로 하산하는 등산 코스를 정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도 이 둘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계획 여행에 한창 빠져있던 때이기도 하고 회사 일 하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포 출발 시즈오카 도착. 시즈오카 공항에서 내려 시즈오카 역(JR)행 리무진을 탔다. 리무진 버스비는 1,000엔. 1시간가량 지나자 시즈오카 역에 도착했다. 고텐바 코스로 오르기 위해서는 시즈오카에서 고텐바로 이동해야 했다. 시즈오카에서 JR을 타고서 한 번의 환승을 하면 고텐바에 도착한다. 1320엔. JR을 타고서 이동하는 중에도 후지산이 보인다.
고텐바에 도착했다. 입산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고텐바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어디를 들를지 예정이 없었다. 역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관광책자 하나를 받고서 쭉 둘러봤다. 프리미엄 아웃렛에 들르기로 했다. 당시 고텐바 역 앞에는 고텐바 프리미엄 아웃렛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 중이었다. 관광객들이 아웃렛에 펑펑 돈을 쓰도록 최상의 서비스를 갖춰놓았다. 고텐바에서 쇼핑을 마치고 다시 시즈오카 역으로 돌아왔다.
저녁 6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때서야 당일 묵을 호텔 예약(?)을 하기 위해 호텔 세 곳에 전화를 했다. 여름휴가철이어서 그런지 모두 예약이 되었다고 한다. 비상상황이다. 당황했지만 늘 그랬듯 '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해는 졌고 근처 서점을 들르기로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근무할 때여서 일본 서점의 풍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서점에 들렀다. 내 옷차림을 보고서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건네었다. 잔잔한 일본 영화에서 봄직한, 점잖고 친절한 아주머니였다. 이름은 마코토였다. 나는 영어로, 마코토는 일본어로 대화했다. 중간중간 손짓과 발짓과 얼굴 근육을 최대한 활용했다. 후지산 이야기와 당일 숙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에서 보면 이방인을 재워주는 지역 주민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영화 주인공이 될 운명은 안되었나 보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서로에게 손인사를 건넸다. 나는 숙소를 찾기 위해 다시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9시 정도가 되었다. 이쯤 되니 호텔에서 하루 묵기엔 시간과 돈이 아깝다고 생각되어 찜질방에 가기로 했다. 여름휴가차 온 일본 여행에서도 찜질방이라니. 특별하고 잊지 못할 여행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찜질방 이름은 OASIS GOTEMBA. 하루 숙박료 3,000엔. 겉으로 보기엔 한국 찜질방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내부 시설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일본 찜질방과 동네 목욕탕 체험기는 함께 묶어 다음에 소개하겠다.) 여러 면에서 한국 찜질방과 차이가 있었는데 안마기 의자 같은 게 수십대가 있다. 한국 찜질방에서는 딱딱한 바닥에 매트를 깔고 자는데 고텐바 찜질방에는 수십대의 수면 의자가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편안하게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온탕에 몸을 지지고 상쾌하게 바깥공기를 마셨다. 대중교통을 알아보기도 귀찮고 동네 구경이나 할 겸 시즈오카 역까지 걸어갔다. 전날부터 등반하는 아침까지 뚜벅뚜벅 계속 걸었다. 평지만 걸었다. 체력을 괜히 당겨 쓴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하고 해발 기준으로는 단 1m도 오르지 않아 손해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멀리 후지산이 보였다. 기대되고 설레었다. 후지산 등산로까지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는 단 세 명이 있었다. 나, 나와 비슷한 복장의 등산객, 그리고 버스 기사. 버스는 꼬불꼬불 산 능성을 타고 힘차게 달렸다. 세 명 밖에 없어서 그런지 버스는 생각보다 빠르고 거칠게 산 능성을 탔다. 귀가 먹먹해진 걸 보니 해발이 많이 상승한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렸다. 가까이 후지산이 보인다. 가슴이 쿵쾅쿵쾅, 전투에 나서는 군인처럼 장비를 체크했다. 선글라스와 등산모자를 착용하고 신발끈과 가방끈을 꽉 조여 맸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생각해보니 칸(국내 국립공원 대피소와 같은 숙박시설)을 예약하지 않았다. 문득 기사 헤드라인 같은 문장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여름 휴가 차 후지산 등반을 하던 한국인, 후지산에서 잠들다.'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후지산에서 잠드는 한국인이란 타이틀은 유일하겠지만 불명예스럽다. 로밍을 하지 않아 통화하거나 인터넷 검색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저기 앞에 아까 함께 버스를 탔던 등산객이 보인다. 어둠 속 희망의 빛 한줄기였다.
다음 편에 계속...
2017년에 다녀왔습니다. 시간표와 금액 등은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즈오카에 방문하시거나 후지산에 방문할 예정이 있으신 분은 시즈오카 블로그와 후지산관광정보 홈페이지를 통해 정보를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 후지산 관광정보 http://app.fujiq-resorts.com/fujitoz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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