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약체질 후지산 등반기 2편
버스에서 내렸다. 내겐 중요한 일 하나와 급하고 중요한 일 하나가 있었다. 당연히 후자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속을 비우는 일이었다. 고텐바 등산로는 코스가 긴 것에 비해 등산로 코스 내에 산장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장이 적다는 건 화장실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산에 널린 게 화장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 데나 흔적을 남길 순 없었다. 대한민국 서울 시민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혹시 몰라서 동전을 챙겼는데 고고메(五合目)에 있는 화장실은 무료였다.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해치웠다. 중요한 일 하나가 남았다. 숙소 예약이다.
* 고고메(五合目): 산꼭대기까지의 등산길을 열 구간으로 나눈 중 다섯 번째 구간.
고텐바 코스가 인기 있는 코스가 아니라서 예약 없이도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만약에 안된다고 하면 어쩌려고, 하산하라고 하면 어쩌려고. 아찔한 상상이었다. 산 한가운데에서 와이파이가 터질 리가 없다. 로밍도 안 했다. 등산로 입구에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등산객, 카토에게 부탁했다. 카토와는 영어로 소통했다. 카토는 해외 출장이 잦았던 영업 사원이라 영어를 잘 구사했다. 카토는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고 산장에 전화를 걸었다. 카토는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멋있었다.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던 고민이 단 몇 초만에 해결됐다. 고텐바 고고메 등산로 입구에는 매점에 들어갔다. 매점에서는 처음 보는 유일무이한 등산 스틱을 판매했다. 고고메 이름을 새긴 친후지산 느낌의 지팡이 스틱이었다. 등산 스틱은 가지고 와서 구입하진 않았지만 전화통화를 하며 인주를 찍는 장인의 솜씨를 옆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제 걷기만 하면 된다. 카토는 내게 산장에서 보자며 넌 젊으니까 먼저 가라고 이야기했다. 한 30분은 몇 m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는데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되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경사가 심하진 않았다. 특이했던 건 화산 분출로 인해 생긴 현무암 알갱이들이 바닥에 깔려 있다. 서울산의 암석 바닥, 그리고 대한민국 대부분의 산의 흙바닥과는 다른 촉감이 발아래에서 느껴졌다. 발이 살짝 현무암질에 안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살짝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도 들어 다리에는 힘이 많이 들어갔지만 딱딱한 바닥을 걷는 것보다는 무릎에 무리가 덜 가는 것 같았다. 참고로 이 현무암질 고텐바 코스의 일부는 마라톤이 진행되는 코스이기도 하다.
중간중간 카토와 땅바닥에 앉아 쉬었다. 카토는 땅바닥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츠가 리타." 힘들다는 뜻이었다. 내가 아는 일본어는 스미마셍, 다이조부, 아리가또뿐이었다. 카토 덕분에 단어 하나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하이쮸를 까먹으며 땀을 식히고 아래 풍경을 즐겼다. 후지산은 화산 활동이 있었던 산이다. 키가 작은 풀들이 드문드문 보이지만 나무는 없다. 해발이 높아서 구름이 가득하다. 구름이 눈 앞에서 천천히 그림을 그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 아래로는 도시 풍경을, 정상 쪽으로는 카오스 풍경이 펼쳐진다. 좌우로는 산능선이 직선 형태로 뻗은 모습이 보인다. 몸을 말아 데굴데굴 굴려 등산로 입구까지 다시 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바로 눈 앞의 구름은 사라졌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듯 운해가 자욱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내가 오르고 있는 산이 후지산이었는데 저 멀리 후지산 같은 환영이 보였다. 뒤늦게 알았지만 후지산의 그림자였다. 가히 성스러운 산이라 불릴만했다. 산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산이라니.
7.5 합목에 도착했다. 나와 카토가 예약한 Sunabashiri칸이었다. 해발 3,090m. 이 높은 곳에 오면 산 아래에서는 깨달을 수 없었던 사실을 깨우칠 거라 생각했다. 인생을 사는 비밀 열쇠 같은 거 말이다. 역시 그런 건 없었다. 풍경이 아름다웠고 이 높은 곳에서도 이렇게나 많은 등산객들이 와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가족 단위로 산을 오른 등산객이 많았다.
일본 후지산 산장은 국내 대피소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첫째, 비용이다. 한국은 20,000원이 안 되는 금액에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데 후지산 산장은 7,000엔(한화 70,000원 이상)이었다.
둘째, 한 공간 내에 식사 장소와 취침 장소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취식할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다. 또한 식재료와 조리도구를 등산객이 직접 챙겨 와야 한다. 하지만 후지산 산장에서는 식사가 제공된다. 메뉴는 카레였다.
셋째, 한국 대피소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관리하는 반면, 산장은 국가에서 허가받은 민간업체에서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때론 운영하지 않는 산장이 있다.
넷째, 한국 대피소는 비용을 지불하고 이불을 대여하거나 침구류를 챙겨 와야 한다. 하지만 일본 산장에는 우리 시골 할머니 집에서 볼법한 두꺼운 솜이불이 있다.
다섯째, 물품보관함이나 신발 보관함이 따로 없다. 한국 대피소에는 신발 보관함이 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지만 신발 보관함 정도는 마련해주지, 맨발로 내려갈 순 없지 않은가. 다행히도 다음날 아침 신발은 제자리에 있었다.
비주얼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정말 맛있었다. 아무래도 고된 산행 후에 먹는 식사여서 그랬나. 아침 식사는 따로 신청을 해야 한다. 나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편히 쉬다가 천천히 오를 생각이어서 아침밥을 신청하지 않았다. 카토는 아침 식사를 신청했다고 한다. 내일은 홀로 산을 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2017년에 다녀왔습니다. 시간표와 금액 등은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즈오카에 방문하시거나 후지산에 방문할 예정이 있으신 분은 시즈오카 블로그와 후지산 관광정보 홈페이지를 통해 정보를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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