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고기로 태어나서>
도심지에는 축사와 도살장이 없다. 도시에 사는 인간은 하루에도 수많은 동물을 먹는데도 말이다. 인간이 매일 싸는 똥오줌이 변기와 배관을 타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가듯, 우리가 매일 먹는 동물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
나는 읍 단위의 시골에 살았다. 나 같은 촌뜨기도 축사는 차를 타고 나가야만 볼 수 있었다. 도살장은 보지도 못했다. 왜 축사와 도살장은 숨어 있는 걸까? 이유는 단순하다. 축사가 내뿜는 각종 오물 냄새와 소리들을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축사(畜舍)는 한자어로 가축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사실 집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죽음이 예정된 동물들의 수용시설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축산 노동은 젊은이들이 꺼린다. 가끔 미디어에서 젊은 농장주 인터뷰를 봤지만 대부분 과일이나 채소를 기르는 농장들이었다. 가축을 사육하는 농장주는 본 적이 없다. <고기로 태어나서>는 한승태 작가의 축산 노동 에세이다. 저자가 책에서 밝혔듯 젊은 사람이 농장에 일하겠다고 찾아오면 농장주는 의심부터 한다고 한다. 실제로 저자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였다.
모두가 꺼려하는 농장에 제 발로 찾아가 일하며 보고 듣고 만지고 때론 죽여가며 그간의 경험을 일기처럼 기록했다. 그 결과물이 <고기로 태어나서>다. 우리가 흔히 고기로 불리는 '동물'은 사육, 수송, 도살의 과정을 거치는데 책에서는 사육의 과정만을 다뤘다.
맛있는 고기: 가축으로 분류되는 동물에 대하여
식용 동물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죽는 시기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두 번째, 바로 시간의 감옥에도 갇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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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태어난 모든 동물은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당한다. 운이 나쁘면 집행 전에 축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돼지의 자연수명은 15-20년이다. 하지만 고기로 쓰는 모든 돼지는 태어나면서 인간에게 '6개월 生'을 선고받는다. 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닭의 자연 수명은 10년 정도다. 수평아리는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알을 낳는 산란계는 '1년 6개월~2년', 닭고기로 태어난 육계는 '30일'을 선고받는다. 고기로 태어난 닭과 돼지의 경우 운이 좋으면 사육, 수송, 도살의 과정을 모두 거친다. 하지만 선고받은 기간 동안 지옥을 견디지 못하면 일찍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운이 나쁘면 사육 과정에 도태되는 것이다.
닭의 경우, 부화장에서 수평아리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모두 도태된다. 자돈이라고 불리는 새끼 돼지의 경우에도 병들거나 몸이 약한 돼지는 도태된다. 도태라는 단어가 익숙지 않은 전문적인 단어 같지만 사육 과정에 여러 이유로 죽인다는 뜻이다. 쇠파이프로 내려치거나 바닥에 내리쳐 죽인다. 동물보호법상 불법이지만 농장에서는 시간이 금이기 때문에 간편하게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불법이면 어떠하랴. 축사에 판사나 검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저자는 죽어가는 새끼 돼지를 보면서 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빨리 숨을 끊어놓는 게 마땅하나 간신히 숨을 헐떡이는 새끼 돼지를 쇠파이프로 내려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숨을 빨리 끊어주든 그렇지 않든, 그곳에서 선, 정의, 배려 따위의 가치는 찾기 어려워 보였다.
동물의 현실은 처참했다. 동물다운 모습은 '동물의 왕국'과 같은 프로그램이나 동물 백과사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인간은 동물을 동물(動物)로 취급하지 않는다. 먹기 위해 기르고 먹을 가치가 없으면 죽이고 버렸다. 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농장주에게 돈이 된다는 것이다. 농장주에게 돈이 되기 위해서 축사의 동물은 빨리 몸집을 키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료만 축내는 돈 먹는 동물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동물은 일찍 죽음을 맞이하고 돈이 되는 동물은 선고받은 생을 살다가 사람의 손에 도살된다. 돼지가 한자어로 '돈'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점이다.
고기로 태어난 돼지와 닭의 삶은 이미 <도미니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충격이 덜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 '개고기의 경우'는 달랐다. 눈물을 쏙 빼냈다. 새롭게 알게 된 참혹한 진실을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강아지와 함께 살아본 경험 때문에 감정이 더 이입되었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종차별주의자였다. 식육견 농장에서 일하는 저자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던 것 같다. 아마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 또한 그러지 않을까 싶다. 강아지와 함께 살아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개'가 인간 사회에서 다른 동물에 비해 더 친한 동물임은 분명하니까.
* 종차별주의: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종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다른 종의 이익을 배척하는 편견 또는 왜곡된 태도.
병아리 떼를 폐기시킬 땐 느끼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개에게는 고함을 지르는 것만으로도 느꼈다는 점은 인간 사회 속에 자리 잡은 동물들이 온전한 삶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할 단계를 암시하는 듯 보인다. 먼저 그들은 상품이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아주 비싼 상품이 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론 인간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너무 맛있거나 아니면 너무 못 생겨서 ‘친구’가 될 가능성이 없는 동물들의 삶은 앞으로도 고달플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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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육견 농장 이야기를 보면서 두 가지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첫째, 우리 사회가 밑바닥에서 개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식육견 농장은 다른 식용동물 농장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다른 동물은 옥수수 가루를 먹지만 개는 모든 음식물 쓰레기를 다 먹는다.
“개 값은 얼마나 해요?” “한 근에 5,000원, 50근을 개 평균 근수로 치거든. 50근이면 한 근이 600g이니까 30kg이지. 그럼 얼마야. 오오이십오, 25만 원이지. 개 한 마리 팔면 25만 원 정도 받는 거야. 개는 닭이나 돼지처럼 값이 들쑥날쑥하지 않아. 개값은 1년 내내 꾸준해. 이래서 개 키우는 게 좋은 거야. 닭이나 돼지는 왜 값이 들쑥날쑥하냐. 이런 건 사료를 먹어야 되는데 그 사룟값이 이랬다저랬다 하거든. 주로 옥수수가루를 먹이는데 미국이나 중국에서 농사가 잘되면 사룟값이 좀 싸지고 잘 안되면 값이 확 올라가거든. 근데 개는 짬밥을 먹이니 그런 거 신경 쓸 게 없지. 그래서 개가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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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암리에 인간 사회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는 개를 통해 처리한다. 호텔, 학교, 음식점 등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는 골칫덩이인데 음식물 쓰레기를 받아오면서 돈을 번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는 개에게 먹여 처리한다. 물론 음식물 쓰레기를 사료화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이 만만치는 않다. 그렇다고 고가의 특수장비나 재료가 필요치 않으니 좋은 사업적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
둘째, 개를 도살하는 방식이다. 주로 감전봉으로 전기 도살을 한다고 하는데 저자가 일했던 농장에서는 질식을 시켜 도살시켰다. 저자는 사다리에 목을 매여 고통스럽게 몸은 파닥파닥 거리며 입으로는 사다리를 '빠각 빠각' 물어 피를 질질 흘리는 개의 모습을 묘사했다. 점차 숨이 끊어지면서 똥을 푸욱 싸고 개의 움직임은 멈춘다.
우리는 천만 반려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쪽에선 애지중지 여기며 가족으로 함께 살고 저편에선 음식물쓰레기를 먹이고 사다리에 목을 매달아 죽이고 있다. 누군가는 개로 요리를 하고 누군가는 입으로 개고기를 넣는다. 이런 현실이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개농장의 사례를 읽으면서 개농장의 개를 모두 구조하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될지 생각해보았다. 음식물 쓰레기에 먹지 못할(?) 쓰레기를 섞어 놓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참 부끄럽고 이상한 다짐이었다. 한 인간으로 산다는 게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힘쓰는 고기: 인간에 대하여
과거의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도살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참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도 축산업계의 피해자였다. 동물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이지만 이 사회와 노동구조 관점에서 보면 피해자다. 한 달에 이틀을 쉬면서 150만 원을 받는다. 주 52시간은 저기 먼 도심지 이야기다. 축사에서는 새벽에 일을 시작하고 때로는 밤에 마친다. 누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 자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운다.
나는 그제야 한국인과 외국인이 받는 임금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일할 당시에 한국인은 월급 175만 원을 받았다. 반면 중국인은 150만 원, 동남아인은 120만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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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 권을 읽고서도 인간의 반응은 다양할 것이다. 뒤돌아서 치킨과 삼겹살을 먹는 이들도 있을 테고 동물복지농장의 고기와 계란을 구입해서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호기심으로 열어본 책에서 마주한 불편함 때문에 뜻밖의 채식을 선언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일주일 정도 어쩔 줄 모르다가 다시 고기를 입에 넣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이 다양하니 책에 대한 반응도 다양할 수밖에.
<고기로 태어나서>는 여느 책이 그렇듯 하얀색 바탕에 검은 글자만이 나열된 책이다. 인간은 책이란 흑백 평면에서 똥오줌에 덮인 축사를 상상하고 시뻘건 피를 상상할 수 있는 동물이다. 상상을 통해 수많은 생명의 비명 소리와 꺼져가는 숨소리도 느낄 수 있는 가히 월등하다고 인정할 만한 동물이다. 그런데 왜 고기 없는 세상을 상상하고 우리 식탁의 현실로 옮기는 일은 그리도 어려울까. 책을 통해 상상하는 세상은 그저 '꿈' 같기 때문일까.
동물들과 마주하며 지냈던 시간은 나를 약자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무감각해졌다. 지난 몇 년간 내 삶을 관통한 가장 일관된 정서는 분명 ‘무감각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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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극에 무뎌진다. '무감각함'에 대한 저자의 고백은 나를 비롯한 독자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며 책을 덮는다.
<Dominion 지배자들>은 아래 링크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