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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Mar 14. 2021

채식주의자의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1편

김밥과 국물 요리 주문하기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일하면서 자주 쓰는 말이다. 무언가를 요청할 때 종종 쓴다. 나는 상대를 배려하고 있음을 드러낼 때 주로 이 말을 사용한다. 반대로 상대로부터 이 말을 들으면 배려받는 기분이 든다. 전달하려는 메시지 앞이나 뒤에 놓으면 겸손하고 예의 있게 만드는 신비함을 지닌 문장이다. 그런데 채식을 시작한 이후로 이 말을 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김밥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채식인들이 외식할 때 즐겨 찾는 음식이기도 하다. 동물성 식품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미리 만들어놓은 김밥을 쟁여놓고 판매하는 음식점도 있지만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김밥은 주문을 먼저 한 뒤에 요리하는 음식이다. 김밥의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손님이 어떤 음식을 주문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주문 후 요리' 시스템은 의도치 않게 채식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일반 김밥을 주문하고 김밥에 들어가는 동물성 식품을 빼 달라고 요청하면 되기 때문이다.


김밥 집에 들어선다. 주문할 차례가 되면 바로 그때 '그 말'이 나온다.


"사장님, 김밥에 햄, 계란, 어묵, 맛살 빼고 다른 야채로 대체해주실 수 있나요? 많이 바쁘시죠?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다'라는 말은 앞에 붙어도 되고 뒤에 붙어도 된다. '번거롭겠지만 부탁드린다'라는 뜻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가끔 점심시간과 같이 바쁜 시간에 김밥 음식점에 가면 '죄송하다'라는 말조차 죄송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쁠 때도 있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보는 초급 채식주의자가 본다면 '번거롭지만 죄송하다'라는 말은 잊어도 좋으니 '햄, 계란, 어묵, 맛살' 네 가지를 꼭 기억하라. 


채식과 비건에 대한 인식이 워낙 무지한 터라 아무 생각 없이 "햄이랑 계란 빼주세요"만 말하면 예상치 못하게 계란이나 맛살이 한 줄 들어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김밥 다음으로 난도가 높은 음식이 있다. 바로 국물이 들어가는 요리다. 한식 음식점에는 국물이 들어가는 요리가 많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콩비지찌개 등. 된장찌개라고 된장만 넣고 끓인 음식이 아니다. 멸치육수나 쇠고기 다시다가 들어갔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물에 OO이 들어갔나요?" 보다는 "국물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나요?"라고 묻는 게 동물성 식품이 들어갔는지 확실히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국물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당황하면서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이 걸 물어보지? 우리 요리 비법을 캐내러 온 경쟁업체인가?'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질문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국물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나요? 제가 채식을 해서 동물성 식품, 고기나 사골로 우려낸 국물이나 멸치육수, 계란을 먹지 않아서요. 혹시 제가 말씀드린 것 중에 들어가는 재료가 있나요?"

정도로 물어보면 대부분 알아챈다. 내가 말한 재료 목록 외에 들어간 동물성 식품이 있다면 이야기해줄 것이다.

성수동에 위치한 칙피스 메뉴판에는 비건 메뉴와 비건 옵션이 표기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건 식당이 아닌 채식 옵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게 매우 불편하다. 확인하는 과정이 먹는 나도, 요리를 하는 요리사도 번거롭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음식을 선택해서 주문하지 않나. 물론 단품 메뉴로 음식을 판매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메뉴판에는 여러 종류의 음식이 있다. 우리는 골라서 주문한다.


채식도 마찬가지다. 다만 채식 옵션 식당이나 육식 전문 음식점에 가면 메뉴판에 채식의 단계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아서 불편한 것뿐이다. 칙피스에 가면 채식 단계가 음식 옆에 조그마하게 표시되어 있다. 비건부터 논비건까지 모두가 식사할 수 있는 음식점이다. '육식 전문점'이 아니라면 메뉴판에 채식 등급이 표기되어 채식인과 음식점 직원 모두가 번거롭지 않고 불편하지 않은 주문의 시간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국내 여러 음식점은 채식 단계를 표기하고 있고 해외에서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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