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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 Apr 04. 2021

장모님에게 쿠키를 선물했다

비건 초콜릿 쿠키


발렌타인데이 며칠 전이었다. 우연히 한살림에서 발견했다. 쿠키를 만드는 법을 알지도 못했던 나는 '쿠키 믹스'라는 네 글자에 홀린 듯 쿠키 믹스 한 봉을 구매했다. 비건 쿠키였다.

집에 돌아와서 제조법을 살펴보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쿠키 믹스와 현미유를 4:1로 섞어준다. 현미유가 없어서 집에 있는 콩기름으로 대체했다. 식용유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추가로 아몬드와 호두를 잘게 잘라 섞어 주었다. 쿠키 믹스는 설탕이 섞인 채로 만들어진 상품이어서 굳이 설탕이나 올리고당을 추가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기분이 한껏 좋아질 만한, 달달한 쿠키를 만들고 싶어서 올리고당을 넣어줬다. 취향에 따라 당도 조절을 하면 된다.


모든 재료가 보울에 담기면 거품기로 휘저어준다. 쿠키믹스가 현미유와 섞이면서 뭉치면 손으로 떼어줬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재료들이 섞이면 이제 어렸을 적 만들기 실력을 뽐내면 된다. 어려울 것 없다. 어렸을 적 찰흙 만들기 시간을 떠올리면 된다. 요리조리 조물딱 조물딱 적당한 크기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든다. 나만의 비건 쿠키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비건 초콜릿 쿠키 제조법을 익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타인데이가 찾아왔다. 마침 장모님 댁에 들를 일이 생겨 쿠키를 선물하기로 했다. 선물용 쿠키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모양을 내고 이름도 새겨 만들기로 계획했다. '장모님'이라 새기기보다 장모님의 이름을 새겨 넣고 싶다. 누군가의 엄마 혹은 누군가의 장모님 혹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장모님의 존재를 존중한다는 마음을 담고 싶었나 보다. 쓰고 보니 조그마한 쿠키에 너무 큰 의미를 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공들여 비건 쿠키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엉성한 비건 쿠키가 탄생했다. 쿠키가 쩍쩍 갈라진 틈으로 이름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쿠키가 바스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쿠키의 모습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세상에 하나뿐인 쿠키가 탄생했다.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게 선물이라지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인영이는 장모님 댁에 도착하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거 쿠키인데 현우가 엄마 준다고 구운 거야."

"어머, 이게 뭐야. 이런 것도 구울 줄 알아?"

"이름도 새겨져 있어."


쿠키를 받으신 장모님은 좋아하셨다. 제빵 일을 하고 있는 YS(인영의 동생)는 담백한 맛이라고 표현했다. 뿌듯했다. 발런타인데이를 기념해서 선물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발렌타인데이 선물이 되었다.


장모님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건 쿠키 선물을 통해 조금은 보답한 것 같아 뿌듯했다. 감사한 이유는 여럿 있지만 요약하면 두 가지다.


첫째, 인영이를 낳아주시고 양육시켜주셔서 감사했다. 너무나 뻔한 첫 번째 이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전혀 뻔하지 않은 이유다. 평소 인영이에게 들었던 성장 스토리를 들으며 인영이도 고생했겠지만 누구보다 고생한 사람은 인영이의 어머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영이의 성장 스토리는 사실 인영이의 어머니의 스토리이기도 했다. 선물은 인영이를 양육시켜주신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했지만 장모님을 응원한다는 의미의 표현이기도 했다.


둘째, 장모님은 '우리 집 냉장고에 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 늘 염려하면서 김치를 보내주신다. 딸과 사위가 밥을 굶지는 않을지 늘 걱정하신다. 결혼 전부터 비건 지향 식사를 한 게 아니어서 장모님 댁에 방문할 때마다 장모님은 돼지고기나 소고기, 닭고기 반찬을 해주셨다. 식사가 끝나면 과자나 과일을 항상 가져다주셨다. 그것을 다 먹으면 다른 간식을 꺼내 주셨다. 그렇게 먹기만 하다 보면 어느새 잠자야 하는 시간이다. 즉 장모님 댁에 도착하면 거실에 앉아서 잠들기 직전까지 계속 먹어야 했다. 장모님 댁에 방문할 때마다 나는 장모님의 멈추지 않는 음식 공세에 매번 '좀 있다 먹겠습니다'라는 패배 의사를 밝혔다. 아마도 장모와 사위의 관계가 어색하기에 장모님 입장에서 사위를 생각하는 마음을 음식 공세로 표현하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시작하게 되었다. 도저히 직접 말씀드릴 용기는 없었다. 아내는 내가 비건 지향 식사를 한다는 걸 장모님께 말씀드렸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도 장모님은 "고기를 먹지 않아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 염려된다"라고 하셨지만 내 입장을 존중해주셨다. 장모님의 속마음까진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장모님은 채소 위주로 반찬을 준비해주셨고 고등어나 갈치와 같은 생선을 반찬으로 준비해주셨다.


지금은 비건 지향의 식단을 유지하고 있다. 물살이(물고기, 생선의 대체어)도 먹지 않고 있는데 아직 장모님께 말씀드리진 못했다. 장모님의 애정표현을 너무도 빨리 막아서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이다. (1년에 많이 봐야 6번 정도인데 내가 아니어도 죽을 운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다.)


사실 장모님이 챙겨주시는 마음에 비건 지향인으로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고민될 때가 많다. 명절 때마다 불티나게 팔리는 한우 세트나 스팸 세트, 참치 세트 등은 대부분 동물을 죽여서 만든 상품들이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준비한다지만 도저히 동물성 식품이나 상품을 선물하고 싶진 않다.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게 비건 쿠키다. 사실 비건 음식을 선물한 게 처음은 아니다. 첫 시작은 청경채 겉절이였다. 명절 때는 아내가 채식 만두를 넣어 비건 떡국을 만들어 대접했다. 현우, 인영, 예숙. 이 셋은 나름 서로의 노력을 통해 어색함 속에서도 나름의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 장모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 나름 잘 타협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매번 찾아갈 때마다 힘 있는 인간들의 조심스럽고 따뜻한 배려 사이에서 희생되는 물살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인간동물이라는 사실에 환멸이 나기도 한다. 물살이의 죽음보다 60세 인생을 사신 인간동물의 마음을 더 걱정하는 나는 비겁한 '인간동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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