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만난 비인간 동물들
약 2년 동안 2박 이상 집을 비우는 여행을 하지 못했다. 함께 사는 고양이 '헬씨'의 건강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5박 6일 제주 여행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헬씨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기 때문이다.
잘 가, 헬씨. 종종 우리 곁에 머물러줘!
충분히 많이 애도했지만 그럼에도 집이라는 공간에 머무는 게 무서웠다. 잠시 집을 떠나 생각도 정리하고 우리 부부의 마음도 서로 달래고 싶었다. 슬프지만 동시에 설렜다.
우리는 공유 자동차를 대여하여 여행했다. 제주에서 서귀포로, 산에서 바다로, 도시에서 산촌으로 구석구석 누볐다. 헬씨를 떠나보내고 동시에 제주에서 그 짧은 기간 동안 길 위에서 수많은 동물을 만났다. 때론 살아있었고 때론 죽어있었다.
제주는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비인간 동물(이하 동물)에게도 그런 걸까? 내가 만난 대부분의 동물은 묶여 있거나 죽어 있었다. 특히 도로 위에서 죽은 동물이 정말 많았다. 제주는 로드킬로 죽는 노루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행 중 살아있는 노루나 로드킬 당한 노루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길 위에서 차에 치여 죽은 새와 고양이를 하루에 한 번 꼴로 봤다.
살아 있는 동물들도 대부분 묶여 있거나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이었다. 목줄에 묶여 있는 시골개, 비계(아시바) 펜스가 쳐진 곳의 말. 목줄이 그리는 원 혹은 반원에 갇힌 시골개의 삶을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승마, 경주 등 어떤 용도로 사육되는 말의 삶 또한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초원 위에서 여유로운 말은 우리가 만들어낸 추상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이용 가치가 떨어진 말은 어디로 가는 걸까.
첫째 날 늦은 밤 도로 위에서 목줄이 없는 개를 만났다. 차를 세우고 개가 어딨는지 살펴봤지만 어두운 밤이어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여행 마지막 날에도 목줄은 있지만 풀려있는 개를 만났다. 숙소 근처 절 주변에 있는 주차장 공터에 앉아 있는 개였다. 공터에 주차한 후에 내렸다. 개와 눈이 마주치자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마치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개는 얼굴과 앞발을 들이밀고 나는 얼굴을 만졌다. 신이 났는지 꼬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아침에 숙소에서 간식으로 먹으려고 쪄둔 고구마가 생각났다. 차 안에서 고구마를 꺼냈다. 나 한 입, 개 한 입. 번갈아가며 고구마를 먹었다. 고구마가 뜨거웠는지 한 번에 먹진 못하고 바닥에 놓고서 식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먹었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차에 올랐고 개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흔들었던 꼬리도 멈추었다. 차에 오르는 우리를 무시했더라면, 못 본 체했더라면, 오히려 마음이 더욱 편했을려만. 괜스레 마음이 아려왔다. 마치 개를 그곳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우리 말고도 그 개와 찰나의 만남을 가졌던 이들이 또 있었을까?
우리가 개를 보며 멈추었던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단순히 개가 좋아서 멈췄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개에 대한 동정심 때문 아니었을까? 우리는 개를 두고 온 것이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 살았기에 두고 왔다는 죄책감, 그리고 동정심이 느꼈을까?
아마도 개는 사람이 키우며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 그런 구조에서 살기에 우리는 목줄 없는 개를 바라보며 일종의 동정심과 죄책감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줄이 있단 건, 누군가가 잃어버렸거나 원래 풀린 채로 자유롭게 산다는 뜻이다. 동시에 목줄은 누군가의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동물에게 자유와 권리란 무엇일까? 인간의 보호를 받는 동물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이드 미러로 멀어지는 개를 바라보며 '마냥 사람을 좋아하는 개'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겠는가. 99명의 좋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단 한 명의 동물 혐오자가 허튼짓을 한다면 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개가 경계심이 많아서 때로는 사람을 공격하거나 문다면, 그 개는 사람을 물었다는 이유로 죽임 당할 것이다. 이 사회에서 동물은 그런 존재다. 목줄이 있다 하여 안전하다고만 할 수 없고 목줄이 없다 하여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문제는 목줄의 유무 혹은 개의 공격성이 아니다. 동물 혐오 사회가 문제다. 동물을 혐오하는 사회에서 동물은 길들여지거나 인간에게 기대어 살기를 본능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동물이 현실에서 본능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개를 버리지 않는다면, 개의 공격성을 제어시키고 잘 훈련시킨다면. 목줄이 채워진 개, 그리고 목줄을 잡고 있는 인간. 많은 동물 TV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안전한 사회'가 과연 개와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일까. 그 안전은 누구의 안전일까. 누가 원하는 공존일까.
이 여행의 출발, 헬씨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10년을 넘게 길에서 살던 헬씨를 우리 집으로 데려온 우리 부부의 힘이 작용했을 텐데. 헬씨가 말년에 1년 반 가량 우리 집에서 보낸 삶이 행복은 아니었어도 불행은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종종 박스나 아르르 침대에서 고개를 하늘로 젖히고 코까지 골면서 자던 헬씨를 떠올리면 불행까지는 아니었을 테지만, 우리의 동정심과 책임감이 헬씨의 자유와 행복을 빼앗지 않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