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을 사과
가을 사과가 가장 맛있다. 왜냐하면 난 가을에만 사과를 먹기 때문이다. 사과는 가을에 먹어야 한다. 봄에 먹는 사과는, 사과지만 사과가 아니다. 더위가 사라지고 싸늘한 날씨의 가을, 온통 푸르렀던 나뭇잎들이 노랗게,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사과가 맛있고 가장 사과답다. 제철과일이 제일이다.
#2. 아침 사과
아침에 먹는 사과는 보약, 저녁에 먹는 사과는 독이다. 사과 내 펙틴이란 물질 때문에 밤에 먹으면 소화활동이 활발해져 화장실을 자주 찾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 사과가 좋다. 하지만 보약으로서 사과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아침에 사과를 먹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간편하다. 워낙 아침 사과가 좋다고 하니 사과 하나, 식빵 하나, 커피 한 잔이면, 몸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느낌이 든다.
둘째, 아침 사과 소리가 좋다. 나는 사과를 칼로 잘라서 먹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 속 사과 하나를 손에 쥔다. 멍이 든 곳이 없는지 살펴본다. 베어 물기 좋은 곳을 정하고 입에 넣는다. 포클레인이 굴착하듯 윗니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사과 별로 소리가 다르다. 좋은 사과는 '툭' 떨어져 나가면서 청명한 소리가 난다. 이 소리는 아침을 깨운다. 좋은 사과는 씹으면 아삭아삭한 소리가 난다. 무른 사과는 힘주어 사과를 베어 먹어야 하고 사각사각 소리가 덜하다. 아침부터 사각사각 소리가 나면 그 날은 뭔가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과를 잘 골라야 하는 이유다.
#3.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사과 하나면 의사는 필요 없어.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주인공의 대사다. 사과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다. 주인공은 사과 하나면 무병장수한다며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런 그를 위해 아내는 매일 아침 사과 도시락을 싸준다. 아내는 먼저 죽고 주인공은 아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일본에 간다. 아들에게 부토라는 춤을 배우고 아내 옷을 입고서 아내와 함께 부토를 춘다. 이십 대에 이 영화를 봤다.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리는 영화였다. 애잔하지만 아름다운 영화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을 아주 잘 표현한 영화였다.
어쨌든 '사과'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4. 돈 내고 먹는 사과
나는 토끼와 발맞춰 산다는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내가 자란 시골은 사과가 특산품이었다. 고랭지 지역이어서 사과 당도가 좋고 상품성도 좋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시지 않았지만 우리 집엔 가을이면 사과가 넘쳤다. 아버지는 이발사고 손님들 중 사과 농사를 짓는 손님이 계셨고 아버지 친구들 중에서도 사과 농사를 짓는 분들이 계셨다. 덕분에 매번 사과를 손쉽게 먹을 수 있었다. 집에 있는 사과는 거의 내가 다 먹었다.
버르장머리는 그때부터 없었나 보다. 생각해보니 제철마다 사과를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단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분들 덕에 사과 가격도 모르고 살았다. 대학에 오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마트에 진열된 고향 사과를 보며, 사과값이 금값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사과를 먹으며 자라왔다는 걸 깨달았다.
독립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문득 되돌아보니 도시에서는 돈 내지 않고 먹는 음식이 없다. 요즘은 시골도 마찬가지겠지만 도시에서는 값을 지불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게 없다. 가을이 되니 시골집 한쪽에 박스 안에 쌓아둔, 울퉁불퉁하여 못생겼지만 단단하고 싱싱하고 큼지막했던 사과가 그립다. 도시에는 온통 둥근 사과 뿐이다.
#5. 소원
예전에 베란다 테라스에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씨앗을 심고 물만 주었을 뿐인데 어엿이 열매가 열렸다. 알차게 자란 방울토마토가 딱 두 개만 열렸다. 아내와 나 하나씩 나눠먹었다. 진한 단맛이긴 했지만, 구매해서 먹는 방울토마토와는 느낌이 달랐다. 단순히 향이나 맛의 차이가 아니었다. 방울토마토가 입안에서 터질 때 그간의 정성과 사랑이 입 안에 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방울토마토의 맛이었다.
작은 텃밭이 마당에 있는 전원주택에 살고 싶다. 마당 한쪽에 사과나무를 심고 싶다. 매년 가을이면 작든 크든 사과가 열릴 것이고, 시든 달든 감격하며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과를 맛보고 싶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사과를 충분히 맛보야겠다.
여름이 다 가기 전 복숭아를 실컷 먹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