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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Mar 28. 2024

감자 버섯 콜리 수프

마흔 이후의 수프

 


 인터넷으로 주문한 수미 감자가 도착했다. 물론 2주 전 일이다. 당연지사 배송료 무료 금액에 맞추기 위해 고구마와 양파도 주문했었다. 나름 계획적인 소비를 했다 자만했지만, 왜 한 주 내내 고구마만 먹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제야 기억 저편의 상자를 열어보니 양파는 폭삭 늙어 있고, 감자에 독이 올라 뿔 같은 싹이 솟아 버렸다. 이래서… 2인 2묘 식구 장보기란 계획이 실전보다 거창해지는 경우가 많다.



 안쓰러운 마음에 양파를 한 꺼풀 벗겨내니 리프팅 시술이라도 받은 것처럼 쌩쌩해졌다. 감자는 싹 있는 부위만 도려내 껍질을 벗기니 크기는 좀 줄었지만 감쪽같다. 처음부터 알감자였다고 맘 편히 생각해야겠다. 누군가 요리는 기세라 하지 않았던가?(누가 그랬지...?) 요리에 미숙한 입장에선 그날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천차만별의 음식이 탄생한다. 그러니 이왕이면 좋은 날을 받아? 최대한 밝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볶음을 할까, 전을 만들까 생각하다 베니건스? 감자 수프를 만들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서였나… 그곳에선 9900원짜리 런치 메뉴로 파스타와 모닝빵, 감자수프를 팔았다. 커피도 줬다. 물론 어쩌다 한 번이었지만, 왠지 그걸 먹고 있으면 부잣집 딸내미가 된 거 같았다. 어째서 갑분 수프가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여러 채소를 한 끼로 뚝딱 먹을 수 있는 요리로 그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생각한다. 영양소를 골고루 간편하게 섭취하는 방밥으론 카레나 덮밥, 죽이나 수프가 정석이라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 수프는 감자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음식이다. (만들기 전까지 그렇게 믿었다.)



 우선 양파를 썰어 단맛을 내기 위해 오일에 달달 볶는다.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해 캐러멜라이징을 하기도 하지만 그 시절처럼 뽀얀 국물을 만들고 싶어 약하게 볶았다. 양파가 어느 정도 익어 투명하고 흐물흐물해지면 깍둑썰기한 감자와 무당 두유를 넣고 중불로 익힌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이 과정이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냥이들과 딴짓을 하다가 두 번이나 넘쳐버렸기 때문이다. 수프를 끓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넘치지도 않고, 바닥에 누르지도 않게 하는 것이 고수의 경지이지 싶다. 그러기 위해선 마녀의 지팡이 같은 요염한 주걱을 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감자가 으스러질 때까지 익으면 조심조심 믹서기에 넣고 곱게 간다. 이때도 갑자기 작동할 경우 봉변을 당할 수 있으므로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그 사이 혼잣말로 욕을 하며 흘러넘친 냄비도 씻고, 가스레인지도 닦는다. 내가 싼 똥 내가 치운다는 자세로 사건 현장을 말끔히 은폐 한다. 곱게 갈린 수프를 다시 냄비에 붓고 썰어 둔 버섯과 브로콜리를 넣고 한 소큼 끓인다. 보통 식으면 더 진득해 지므로 이때 원하는 농도에 맞춰 두유를 더 첨가하는 것이 좋다. 용암처럼 천천히 끓어오르기 때문에 센 불로 끓이다가는 뒷 일은 책임질 수 없다. 약불로 뭉근히 끓이다가 채소가 어느 정도 익으면 소금과 후추를 넣어 마무리한다. 기호에 따라 치즈나 버터를 넣어도 좋겠지만 되도록 가공 유지방을 피하고 싶어 최소한의 조미를 했다. 그 시절 베니건스 수프처럼 유복한 맛은 아니지만 나름 가볍고 담백한 게 지금의 내 입맛엔 더 맞는 거 같았다.



 이렇게 또 한 솥 끓여 놓고 나니, 한 삼 사일을 그런대로 버틸? 수 있을 거 같다. 무슨 전투식량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반찬 셔틀과 가공식 없이 매일 일 인분씩, 삼시세끼 차려 먹는 일은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중간에 넘 치치 않았다면 일주일 먹을 양은 되었을 것이다 자책했다. 부지런히 혼밥을 해 먹는 사이 쏟은 쌀 한 톨, 흘러내린 수프 몇 방울도 마음이 저리는 일이라는 걸 배우고 있다.



 수프는 주로 에너지가 방전되어 밥 해 먹기 귀찮은 저녁에 한 그릇씩 데워 먹는다. 그제는 통밀 식빵으로 만든 마늘빵과 함께 먹었는데 혼자서도 그럴듯하 한 끼를 해결한 거 같아 자존감이 상승하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 예능에서 알베르토가 누텔라를 듬뿍 바른 팬케이크를 보고 마흔 이전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말하는 걸 봤다. 큰 병 치르고 딱 마흔이 된 나로서는 뼈저리게 공감되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추억까지 맘껏 누릴 수 없다는 건 억울한 일이다. 떡볶이, 치킨, 바나나 단지우유… 음식에 스며든 좋은 기억들을 버리지 않고 잘 모아두었다가 이렇게 틈틈이 나만의 방식으로 떠올리는 것도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p.s 이번 주도 내내 비가 오네요… 라디오에서 황사비라고 해서 산책할 마음을 접고 냥이들과 투닥거리며 보냈습니다. 봄장마라고 해야 할까요… 우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창 밖 멀리 벚꽃들이 보이는 걸 보니 봄은 봄인 거 같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미세먼지 나 시원하게 씻겨가서 전국의 비염인들이 맘껏 시원하게 호흡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야 좋지만, 흐린 날이 있어야 좋은 날에 감사할 수 있겠지요. 가족들과 집콕하며 옹기종기 봄날 같은 온기를 느끼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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