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로마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펜을 사곤 한다. 네덜란드에서는 반고흐 해바라기 모형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펜, 파리에서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고풍스러운 문양이 그러진 펜, 보라카이에서는 뚜껑에 기타 모형이 달린 알록달록한 나무로 된 펜을 샀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만년필을 샀다. 나의 비늘 모양 타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여행지에서 산 펜이 잘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늘 고장 난 펜을 샀다. 어느 순간 잉크가 닳거나 굳어 혹은 완전히 고장 나 펜이 나오지 않으면 억울했다. 한 번도 마음껏 뭔가 쓴 적도 그려본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만년필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자인 나는 불필요한 짐은 곧바로 버린다. 낮에 산 티셔츠를 저녁에 거울 앞에서 입어보았을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레기통에 넣는다. 로마의 만년필은 본래 만년필 촉이 장착되어 있고, 용도를 다르게 쓸 수 있도록 볼펜용 촉도 있었다. 내가 원한 건 나의 첫 번째 만년필이어서 사자마자 케이스와 볼펜용 촉은 버렸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만년필 촉에 문제가 있어 잉크를 채우고 빈 종이 위에 수백 번 의미 없는 곡선을 그려야 겨우 몇 분 정도 잉크가 배어 나와 글을 쓸 수 있었다.
오랜만에 중요한 메모를 하려고 만년필을 찾았는데 펜촉을 물에 담구어 묵은 잉크를 빼내고 아무리 잉크가 나오길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가능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사람이다. 친구가 선물한 물고기가 각인된 라이터 케이스를 잃어버리면 똑같은 케이스를 해외배송으로 주문해 55,000원의 배송비를 날려먹어도 괜찮은 사람이다.
새로 산 물건은 선물과 동일할 수 없고 끝없이 원본의 부재를 상기시키더라도 원본의 부재의 실체라도 가져야 되는 사람이다.
로마의 만년필은 만년필 전문 브랜드도 아니고 웬 패션 브랜드에서 나온 상품이라서 동일한 펜촉만 구매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공식 홈페이지는 느리고 다운되고 도무지 관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물건을 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나는 비슷한 펜촉을 찾아 구매하려고 장바구니에 담다가 그 펜촉이 끝부분까지-펜의 몸체와 이어지는 부분- 골드가 아닌 것, 펜촉의 머리에 꽃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구매를 포기했다.
똑같은 만년필은 공식적으로 단종이었고, 구글링으로 알리익스프레스에서 같은 만년필을 발견했다. 나는 그걸 구매했다. 펜촉만 나의 만년필에 이식하려고. 만년필도 모르고 필기구에 별관심이 없는 내게 펜촉 값으로는 지나치게 비쌌다. 중요한 건 내 로마의 만년필이 다시 기능하는 것, 원하는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로마에 대해 생각하면 항상 창문(사진에 보이는 저 창문이다)이 앞뒤로도 열리고 위아래로도 열리던 것이 떠오른다.
나는 위아래로 열리는 창문이 있다는 걸 몰랐고 창문이 분리되는 줄 알고 몸보다 큰 창문을 온 상체로 이고 한참을 서있었다. 그리고 다시 잠근 뒤 일주일 간 환기는 꿈도 못 꿨다.
붉은 타일이 깔린 무대처럼 어둡고 추운 방. 침대 바로 위에 그 창문이 있었다. 잠든 내 몸 위로 움직이는 유리관처럼 창문이 떨어져 내릴까 봐 무서웠다. 아프기만 하고 안 죽을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산 펜은 왜 늘 고장일까?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남자는 앞으로 '고장'인 순간에 서로를 부르자고 했다. 사실 그런 남자는 없다. 아무튼 다음 여행은 꼭 리스본으로 가야지. 펜을 사야지. 그리고 펜이 잘 나오는지 확인해야지. 잘 안 나와도 그건 이미 내 펜이지.
세부 공항 기념품 가게 매대에 매달린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수십 마리 나무 고래 상어를 떠올린다. 나는 그 앞을 서성이며 얼핏 똑같이 생긴 것들 중에 무엇을 고를지 고민한다. 흠집이 난 나무로 만들어진 등에 상처가 있는 작은 고래 상어를 본 순간 생각한다. '내 상어야.' 여행지에서 산 펜은 늘 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