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긴 무인 호텔 방문 앞에서 조지 부시에게 기도했다

아이슬란드에 혼자 간다고요?

by rummbl


아이슬란드, 불과 얼음의 땅. 작가 톨킨이 <반지의 제왕> 모르도르를 빚게 한 땅. 드라마 <왕좌의 게임> 눈먼 노인 아에몬 타르가리엔이 머무는 중무장 지대, 벽 바깥의 땅. 그는 밤의 경비대로 한평생을 보낸 뒤 노쇠해 눈이 먼 채로 말한다. 젊은 시절 도망쳤던 사랑에 대해서, 지금 곁에 있는 것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눈동자 색과 웃음소리, 부드러운 뺨에 대해서.


그가 닫힌 눈꺼풀 아래 바로 이 순간 불러온 몇십 년 전의 연인. 밤의 경비대는 의무를 위해 결혼 할 수 없으나, 아이가 생긴 신입에게 그는 떠나라 권한다. "사랑은 의무의 죽음일세."라는 말을 남기며. 이것이 내가 사랑에 관해 끝없이 속으로 되내는 말이다.


아무튼 '간달프를 사랑한 그리핀도르 출신 스트레인저 띵스를 찾아다니는 모험가인 나'는 이미 오래전에 아이슬란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에 가겠다고 결심한 지 6년 만에 24시간이 꼬박 걸리는 아이슬란드행 티켓을 끊는다. FI319,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로 경유하는 비행기의 편명은 내게 고유한 코드가 되어 언제 어디서든 꺼내 적을 수 있게 된다.




한국에서 노르웨이까지, 다시 아이슬란드로, 공항에서 숙소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짐을 푼다. 무인 호텔의 휑한 프런트, 벽에 걸린 고장 난 커다란 원형 시계, 예약 앱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어두운 조도의 복도와 계단.


호텔에는 구석구석 수십 개의 그림이 붙어있고 그림을 위해 조명을 세팅해 놓은 전시장처럼 보일 정도다. 어쩌면 그림을 사랑해서 많이 그리거나 소장한 사람이 그림을 자랑하기 위해 이 호텔을 운영하는 건 아닐까?


본격 여행이 시작되는 첫날 새벽 3시, 샤워를 하려다 방 안에 열쇠를 둔 채 호텔방문을 잠갔다. 친구가 선물해 준 어글리 잠옷 세트를 입은 채 모우닝 머틀처럼 호텔을 헤매고 다닌다. 호스트는 가끔 새 게스트가 있을 때나 몰아서 청소를 할 때만 호텔에 오는 것 같았다.


고래 투어를 데려가줄 버스가 오전 9시에 오니 그전에만 호스트와 마주칠 수 있길 바라며 시간을 때우기 시작한다.


아이슬란드에서 나를 지켜준 토템


새벽 4시가 지나자 으슬으슬 추워졌고 주방으로 가 차 한잔을 타 휴게실로 간다. 나는 남이 입 댄 음료수는 마시지 않고, 공용 식기는 더더욱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나는 완전히 여행자 자아로 전환된 상태였다. HP회복을 위해 동굴에서 쉬는 RPG 용사처럼 주저앉는다.


본능적으로 휴게실에서 가장 따뜻한 곳을 찾았다. 휴게실에 비해 코딱지만 한 라디에이터가 있었는데, 소파를 몸으로 밀어 바짝 그 앞에 붙이고 앉았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휴게실엔 과연 이걸 누가 할까 싶은 모노폴리 등의 보드 게임, 낡은 투어 책자들이 널려있다.


잠긴 방문을 카드로 여는 장면 혹은 방법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걸 떠올렸지만 내게는 카드가 없다. 잠긴 방문 안에 나의 모든 것이 있었다. 카드가 든 지갑도.


나는 로비에 있는 책장을 뒤지기 시작한다. 카드처럼 빳빳한 책 표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선택한 것은 조지 부시의 자서전이었다. 양장본이고 커버가 따로 있었는데 꽤나 질 좋게 코팅되어 있었다. 호텔 방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조지 부시 자서전 커버를 문틈 사이로 밀어 넣었다. 위아래로 아무리 힘을 줘도 방문은 열리지 않는다. 물론 이런 얕은 수작으로 열린다면 그것도 큰일이겠지.


잔뜩 늘어나고 구겨진 조시 부시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물어줘야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를 한 잔 타서 다시 휴게실로 돌아갔다. 이젠 너무 추웠다. 커피를 마시니 좀 똑똑해지기 시작했다. 휴게실에 있는 모노폴리 박스 안에 카드가 잔뜩 들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카드 세 장을 든 채 위풍당당 다시 내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조지부시 자서전 커버를 구기고 모노폴리 카드 3장을 망가뜨린 사람이 되었다.




그 사이 일정에 맞춰 호텔을 나가는 외국인들을 붙잡고 사정을 얘기하고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3명의 외국인이 호스트에게 301호 여자의 방문이 잠겼고 당신이 올 때까지 호텔에서 기다리겠다, 고 전해주었다.


그러나 아침 8시, 나는 여전히 잠옷 바람으로 휴게실에서 떨고 있었다. 한 가족이 부엌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제 전화를 걸어도 되는 시간 아닐까? 생각하며 다시 도움을 요청한다. 전화를 받은 호스트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비상키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가족 중 아버지가 나를 따라와 스테프룸에서 비상키를 찾아주었다. 나는, 당신은 나의 히어로입니다!!라고 계속 계속 외친다. 그는 네 알람을 먼저 꺼야겠는데? 말한다. 방 안의 핸드폰에서 모닝콜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씻고 호텔을 나와 픽업 차량에 탄다. 추위를 대비해 플리스, 바람막이, 패딩까지 다섯 겹을 껴입었다. 방수용 장갑도 꼈고 미끄럼 방지가 탄탄한 등산용 신발도 신었다.


바닷가에 도착해 배에 올랐다. 빙하와 닮은 바다의 색, 멀리 보이는 설산. 고래를 보기 위해 고래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한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항구에 모여 있다.


바다는 배가 나아가는 대로 거세게 부서진다. 설산은 도무지 가까워 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자연에서 고래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믿지 못 할 행운이지만, 특히 한 겨울 아이슬란드에서, 수도인 레이캬비크에서 고래를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투어 프로그램이 있었고 나는 그걸 포기할 깜냥은 못됐다.


바닷바람을 맞으니 새벽 내내 추위에 얼었던 몸이 다시 굳어온다. 직원들이 성의 없이 코코아를 타준다. 가루가 뭉쳐있지만 두 손을 대우기엔 나쁘지 않다.



배는 오래오래 깊은 바다로 나아간다. 선장은 (아마도 자신들만의 어떤 시스템으로 확인하는 듯) 고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깊은 바다로 들어간 뒤 조금씩 조금씩 스팟을 이동하다가, 오늘은 고래를 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선장도 직원들도 미안한 기색이 없고 승객들도 불만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가 멈춘다. 배는 시동을 끄고 소리를 죽인다. 선장이 주변에서 돌고래 무리가 감지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새끼 돌고래들과 어미 돌고래가 함께 있을 거라고 선장은 말한다.


귓가를 치던 배의 모터 소리가 그치자 온바다가 고요해진다. 승객들도 숨을 죽인다. 우리는 이십여 분 구겨진 코코아 잔을 쥐고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가만히 기다린다. 바닷바람과 물결, 작은 웅성임. 그 이상한 의식 뒤에 선장은 이제 항구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사실 아이슬란드 선원들은 고래가 나타나지 않을 걸 알면서 외국인들을 태우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 같다. 코코아를 마시며 기꺼이 굴복한다. 육지에 가까워 오자 다시 핸드폰 인터넷이 작동하기 시작했고 며칠 뒤에 떠나는 나의 아테네행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아무렴. 나는 몇 시간 전에 닫힌 호텔 방문을 열려고 조지 부시 자서전 커버를 밀어 넣고 있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게 있을까?



한여름에 태어나 연탄 피우는 방에서 고구마처럼 구워진 내게 세상은 언제나 추웠다. 겨울은 계절이 아니라 통각이었다. 도무지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겨울의 모든 것은 어떤 순간에는 빨리 감기 한 것처럼, 어떤 순간에는 늘어진 테이프처럼 망가진 채 남았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숙소 바로 뒤의 설산을 바라본다. 해가 없을 때는 얼음처럼 푸르게 빛나고 해가 비칠 때는 오렌지색으로 달아오르는 그 묵묵한 풍경을 본다. 아이슬란드는 내게 말한다. '우리는 처음 만났는데 왜 나를 원망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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