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파타야에는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수영장이 있다. 세로 71m로 숨넘어갈 때까지 자유형을 두 번해도 끝에 닿지 않는다.
선베드에서 낮잠을 자다 "해삐아워!" 외치며 종을 치는 호텔 직원의 목소리에 몸을 뒤챈다. 물의 온도는 다정하고, 노을은 수영장 타일 색이었다가 정원에 핀 꽃의 색이었다가 얼굴을 바꾸며 수면에 고인다.
그 호텔에 다섯 번은 넘게 갔다. 파타야에 더는 관광할 곳이 없고 대신 단골 식당, 단골 메뉴가 생겼다. 큰 상가 건물 화장실에 가면 꼭 길을 잃어 들어갔던 문이 아니라 다른 쪽 문으로 나오는 길치인 나도, 그 호텔 주변 지도는 그릴 수 있다.
몇 년 전 친구와 그 호텔에 갔다. 친구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남아 며칠 더 보낼 예정이었다. 친구가 귀국한 날, 종일 수영장에서 놀고 락스 냄새나는 햄버거를 먹고 물안경을 책갈피 삼아 썬베드에서 책을 읽었다.
룸에 돌아와 샤워하고 머리에 큰 타월을 두르고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어머니에게 카톡이 와있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그 말은 즉시 꼬챙이처럼 나를 꿰고 나는 물밖에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운다. 엄마가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엄마 엄마 나 어떡해" 반복한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 비명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너 여행 갔다고 하니 돌아오면 말하라고 했는데..라고 한다. 아빠는 미쳤어? 화내며 전화를 끊고 울면서 젖은 머리를 말린다.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한다. 프런트 직원이 투숙일이 남았는데 괜찮냐고 묻는다. 투숙일이 남은 건 알고 있고 나는 전혀 괜찮지 않다.
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비행기표를 환불하고 한국으로 가는 새 표를 산다. 인천공항에서 곧장 서울역으로, 다시 대전으로, 대전역에서 장례식장 까지는 아버지가 데리러 오기로 한다.
나는 태어나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확보할 수 있는 티켓을 산 뒤 더 빠른 티켓을 찾아보고, 일단 움직일 수 있는 방향으로 걸으며 다음 행동을 한다. 내내 운다. 눈물은 뺨에 번지고 입술로 흘러든다. 가슴에서 물리적인 고통이 느껴지고 얼굴은 일그러진다. 캐리어를 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여섯 시간의 비행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다. 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타야에서 대략 열 시간 만에 할아버지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할 수 있는 최단 거리, 최단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소도시 장례식장으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 대전역에 왔다.
차에 오르자 나는 몇십 번 연습한 말을 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절대 내게 숨기지 말아 달라"고. "내게 이야기 하고 내가 결정하게 해달라"고.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본들, 나중에 할아버지가 죽은 시간 속이었다는 걸 알면 모든 것이 얼마나 끔찍해지겠냐"고. "내가 아무리 빨리 와도 지금은 늦지 않았느냐"고.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냐, 알겠다, 약속한다, 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그 약속을 잊었을까 두렵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상복 입은 엄마가 나를 보고 뛰어나오며, 그러게 태국 가기 전에 외갓집에 들렀다 가라고 하지 않았냐고 말했다.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내게 평생 고운 것만 줬다. 가장 예쁜 딸기를, 가장 부드러운 부위의 고기를. 풀이 난 쪽으로는 걷지 못하게 했고 비가 오면 바람이 불면 행여 무언가 나를 해칠까 피아노 학원도 못 가게 했다.
나는 그 말이 엄마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비명인 걸 안다. 나라고 그 말을 잊었을까. 장례식장까지 가는 내내 그 말이 나를 찌르고 또 찔렀다.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문장이 또 하나 생겼다고 느꼈다. 게임의 세이브존처럼, 암전 되었다가 정신 차리면 언제나 나는 그 말 앞에 다시 서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는 엄마 옆에 동생이 없다는 것에 화가 난다. 동생은 고향에서 일 때문에 아직 못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 영정 사진 앞에 절하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조문객에게 음식을 내주는 동안 동생이 도착한다.
갓 스무 살 무렵 외사촌 동생 둘과 나보다 두 살 어린 내 동생까지 셋이 상주 자리에 나란히 앉아있다. 중학생 때 150cm를 겨우 넘긴 내 키가 그 후 거의 자라지 않은 것과 달리 동생들은 나보다 30cm는 크다. 셋이 앉은 모습이 대견하고 예뻐 어쩔 줄 모르겠다.
나는 동생에게 나와보라고 한다. 동생은 "어 누나 왔나" 하며 따라 나온다. 동생은 기합 받는 사람처럼 내 앞에 선다. 나는 왜 늦었냐 묻고 동생은 일 때문이라 한다. 나는 네가 일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도 좋고 네 상사에게 좋은 사람이었겠지만, 이 순간 네가 책임감을 가지거나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그쪽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태국에서 여기로 오는 동안 두 시간 남짓 거리에 있던 네가 여기 못 와있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이번은 처음이지만 다음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내가 도착했는데, 엄마 옆에 니가 없으면 절대 안 된다고 화를 낸다.
동생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생은 아기면서 어른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아이지만 어른처럼 화를 낸다. 동생은 누나의 슬픔 앞에 어른스레 굴기 위해 노력한다. 동생은 그때 그러는 누나는 뭘 잘했냐고 따질 수도 있었다. 지난 십 년 간 나는 그런 누나였다. 그러나 동생은 누나 말이 맞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번지르한 말이나 해대지 그 애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
삶의 마지막 예식을 하는 곳, 죽음을 맞닥뜨린 산 사람들이 모여 우는 곳. 나는 장례 공간에 딸린 캄캄한 구석방에서 내내 선잠을 잔다.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친척들이 안부를 묻는 것도 귀찮아 아무 말도 안 한다.
할아버지는 새벽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구급차를 불렀고 할아버지는 병원에 실려가는 동안 이미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성격 급한 양반, 급하게 갔다, 했다. 호상이다,라고도 했다. 호상이 뭔가. 기쁜 탄생이 없듯 기쁜 죽음도 없다.
장례지도사가 관에 할아버지를 모시기 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보라고 부른다. 나는 앞장선다. 나는 그럴 자격과 의무가 있는 손주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내가 외갓집에 가면 김장하는 큰 다라이에 갈비를 쟀다. 할아버지는 내 물건을 살 때 하나만 사는 법이 없었다. 같은 걸로 3가지 색을 골랐다. 철마다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담은 택배가 도착했다. 머리 방울, 머리띠, 신발, 옷, 모든 것들은 꼭 3개씩 짝지어 있다.
가만히 누운 할아버지를 본다. 약간 부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다문 할아버지를 본 적이 별로 없다. 할아버지는 평생 일을 했고 공부를 했고 새로운 꿈을 꿨다. 할아버지는 나를 사랑했지만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으며, 게으른 걸 싫어했다. 아침저녁으로 일했고 손마디가 굵었다. 지붕 있는 곳에서는 앉으면 책을 읽거나 메모했고 누우면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는 할아버지가 잠들어도 꺼지지 않았고 가족들은 그걸 '할아버지스럽다'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평생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고 말년에 굳이 방앗간을 열었다.
엄마를 제외한 세 명의 외삼촌은 그런 할아버지를 못마땅해했다. 평생 할아버지 고집으로 외할머니가 고생한다 생각했다. 오직 나의 어머니만이 자신의 아버지를 열렬히 사랑했다. 외할머니의 고생은 가슴 아파하면서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따로 작동했다.
나는 늘 눈에 힘을 주고 무언가 강한 어조로 말하는 모습으로 할아버지를 기억한다. 장례지도사가 가지런히 누인 할아버지의 모습은 낯설다. 가까이 다가가 할아버지의 이마를 만지고 손을 잡아본다. 이미 후회되는 순간이 많기에 이 순간을 그렇게 남기기 싫어 꼭 해야 할 말을 한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제의는 시작된다. 영정 사진 앞에 상을 차리고 돗자리를 깔고 장례지도사가 무언가 망인을 위한 소리를 읊고, 술을 올린다. 장손인 외사촌 동생이 술을 올리고 나서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 할 때 내가 나선다. "저도 한 잔 올릴게요. 제가 너무 멀리서 너무 늦게 와서." 나는 술을 올리고 할아버지한테 인사한다.
할아버지 관이 나갈 때 영정 사진은 장손이 들어야 한다고 한다. 다시 내가 나선다. "그건 제가 들게요" 장례지도사는 외손주가, 여자가 그걸 드는 법이 없다고 한다. 악의 없이 하는 말이지만 힘이 있었으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 같다.
가족들이 나서 "얘가 할아버지가 젤 귀히 여겼던 손주예요." 말한다. 관이 나갈 때도 장지에 갈 때도 할아버지 영정 사진은 내 차지다. 내가 할아버지가 젤 귀히 여겼던 손주다.
장례식이 끝나고 외갓집에 오니 외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있을 때는 버리지 못했던 물건을 마구 태우기 시작한다. 속 시원히 다 치우고 싶다 했다. 외삼촌들이 말린다. 빨리 치울 필요 없다고, 갑자기 허전해지면 어쩌냐고 한다. 외할머니는 평소처럼 화통하게 갑자기 허전할 게 뭐 있냐며 움직인다. 그러면서 머리에 꽂은 하얀 리본 핀은 며칠을 그대로 둔다.
할아버지 책상엔 최근 관심을 가졌던 분야의 책과 메모가 있는 노트들 펜들 그리고 사진 수십 장이 있다. 사진은 다 손주들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대부분 내 사진이다. 나는 무너진다. 나는 할아버지가 나를 그리워하는 줄 몰랐다. 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서, 예쁘게 보이는 시절이 지났으니까,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줄 몰랐다.
아버지는 말한다. 외갓집에 들르면 할아버지는 늘 나는 안 오냐, 나는 어디 있냐, 물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똑똑하고 분노할 줄 아는 어른이었지만 부당한 일을 겪으면 내 손주가 누군 줄 아느냐, 소리쳤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말을 잘해서 크면 아나운서가 될 거라고 했다. 대신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었고 할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하려면 아나운서처럼, 뉴스에 크게 나올 만큼 잘 되는 일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 부담이었고 갚지 못할 기대였다.
서울에 정착하려 애쓰는 동안 나름대로 내가 선택한 길에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책상에서 어린 시절 내 사진을 보며 나를 그리워했다.
할아버지의 노트에는 '이제와 뒤돌아보니 회한이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같은 문구들이 적혀있다. 괄괄한 노인. 어디에 도달하려고 했을까. 나는 할아버지 사진 한 장과 만년필을 챙겨 가방에 넣는다.
외삼촌들은 할아버지가 매번 새로운 꿈을 꾸는 게 어리석고, 외할머니 고생만 시켰다고 했지만, 나는 나의 엄마처럼, 할아버지의 늙지 않는 마음과 꿈을 존중하고 존경했다. 살아 계실 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둘째 외삼촌은 삼촌들 중 가장 마르고 재바른 사람이다. 엄마도 그렇지만 외삼촌 셋도 외할머니에게 효자다. 할머니가 막내 삼촌에게 '우산 좀 갖고 와라'하면 첫 째 삼촌은 일어섰고, 둘째 삼촌은 이미 우산을 갖고 왔다. 둘째 외삼촌은 외할아버지를 가장 미워했다. 내 아버지는 훗날 둘째 외삼촌이 장례식을 치르며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나는 말했다. "아니에요"
둘째 외삼촌은 장지에 다녀와 집으로 돌아가는 외사촌 동생과 우리 남매에게 봉투를 하나씩 준다. 차비라고 한다. 나는 손사례 친다. 내 할아버지 장례식에 와서 차비받아 돌아갈 일 없다고.
둘째 외삼촌은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시는 거다, 하며 말이 끝나기 전에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어른이 된 후 처음 외삼촌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 봉투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주는 거라면 당연히 받아야지. 내가 할아버지가 가장 귀히 여긴 손주다. 내 아버지는 훗날 둘째 외삼촌이 장례식을 치르며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나는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우는 둘째 외삼촌을 안아줬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장례식 장면이 나오면 보지 못한다. 그 구간을 넘기고 다음부터 본다.
엄마와 가끔 전화하며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는 "맞아. 너무너무 보고 싶다. 그치." 말하며 운다. 우리는 눈물방울 안에 함께 있다. 같은 슬픔을 맞대는 것 만으로 어떤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 년은 지난 것 같다. 아직도 한밤 중 캄캄한 내 방 침대에서 눈을 질끈 감는다. 어젯밤 날이 밝도록 죽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번만 얼굴을 보고 싶다 한 번만 다시 만나고 싶다 한 번만, 빌었다.
종교도 과학도 철학도 답을 주지 못한다. 죽은 할아버지를 만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그게 외할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파타야에는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하는 수영장이 있다. 나는 그 수영장에서 생에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부고를 들었다. 그 후에도 그 수영장을 찾았다. 내 마음이 변했는지 알고 싶었다. 수영장이 미워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부고가 그날로부터 시간에 맞춰 옅어지지도 않았다.
때때로 일상에서 외할아버지의 부재가 떠오르면 눈밑이 칼로 베는 것 같다. 할아버지를 만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그게 할아버지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는 그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