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를 덮고 잠들었다

한겨울 아이슬란드에서 혼잣말했다 살아 있길 잘했다고

by rummbl


연말 아이슬란드는 수도인 레이캬비크 외에 대중교통이 없다. '한강의 기적' 끝무렵 나고 자라 '전 국민 금 모으기 운동'으로 IMF를 극복한 '하고자 하면 한다!' 정신으로 살아온 한국인인 나는 처음엔 그 말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대중교통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비교적 4가지 계절의 강세가 비슷한 곳에서 자라온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나라가 지구 꼭대기엔 있었던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계절은 겨울과 fucking겨울로 나뉜다.


'투어버스'를 예약할 수는 있었다. 보편적인 투어 개념이 아니라 호텔에서 관광지까지 픽업해 주고 다시 호텔에 드롭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그마저도 수도에서 조금 나아간 남부 지역까지만 운행하고, 12월 아이슬란드의 험준한 북부로 데려가주지는 않았다.


나는 아이슬란드 북부를 꼭 보고 싶었고, 렌터카를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전을 못했기 때문에 일행을 구하려 했다. 백수가 아닌 이상 일주일 간의 긴 시간을 내줄 친구는 없었다. 한국인의 휴가라는 것이 그렇지. 2주 간 운전 연수를 받고 직접 운전하려 했으나 모두가 뜯어말렸다. 심지어 틴더에서 매칭된 남자에게 "운전 잘하니?" 물어보기까지 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안 된다'는 말만 들어본 결정이 있었나? '비난 양파'가 된 기분이었다. 칭찬받는 양파가 더 잘 자랄까, 비난받는 양파가 더 잘 자랄까, 비교해 기르는 그 실험의 비난만 받는 양파.




그리하여 혼자 떠난 아이슬란드에서 핸드폰이 고장 났다. 연휴와 신정, 주말이 겹쳐 3일 간 고립되었다. 핸드폰이 고장 나니 시계, 지도, 알람, 카메라, 바우처, 전화까지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길을 잃고 헤매다 호텔로 돌아왔다. 밤새 몇 번이나 깰 정도로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렸다.


전날 투어가 날씨가 험해 취소됐는데, 그날 새벽은 더 심했다. 이번에도 투어가 취소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관광지 두어 개를 들르고 '오로라 투어'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실상 이번 여행의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에 오면 느낀다. '오로라 투어'를 나선다고 해서 모두 오로라를 볼 수는 없다는 것, 오로라를 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 자연에 순응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걸 아는 나라와 사람들만이 가지는 정서를 나는 갖지 못한 채 자랐다는 것을.


어차피 취소될 테고, 픽업 버스는 오지 않을 텐데 굳이 나가서 기다릴 필요 있을까? 하지만 나는 핸드폰이 고장 나 투어가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기에, 혹시 픽업 버스가 나를 데리러 올까 봐 약속 시간에 나가있어야 했다.


그날 투어는 1박 2일 일정이었다. 꽤 먼 지역까지 이동해 다른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와야 했다. 캐리어에 짐을 싸고 버스가 올 시간까지 기다렸다. 투어가 취소될 거라 확신해 머리도 안 감고 모자를 썼다.


여행지에서 계획이 틀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투어가 취소되면 내가 묵을 숙소가 없다는 거였다. 일정 상 그때 머무르고 있던 방을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워줘야 했다.


이미 핸드폰 없이 사람 하나 없는 아이슬란드 거리를 쏘다닌 나는 두려울 게 없었다. 투어가 취소된다면 1. 그냥 내 방에 있다가 새 손님이 오면 쫓겨난다 2. 세탁실 혹은 휴게실에서 잔다, 지붕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라는 옵션이 있었다.


하루 네 시간만 해가 뜨는 아이슬란드의 겨울. 아침 여섯 시 무렵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컴컴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별이 잔뜩 뜬 날이었다.


문득 아이슬란드 여행 정보를 나누는 카페에서 누군가 "오로라 보러 나가는데, 혹시 보지 못하면 별구경이라도 실컷 하겠죠?"라고 쓴 글에 다른 이가 "별이 안 보이면 어차피 오로라도 안 보입니다."라고 답글을 달았던 걸 떠올렸다. 그냥, 핸드폰이 없으면, 외부와 단절되면, 별의별 일을 다 떠올리기 마련이다.

약속된 시간에서 1시간이 넘도록 픽업 버스는 오지 않는다. 나는 호텔 휴게실에서 아침을 먹던 프랑스인 소피에게 혹시 내 투어가 취소되었는지 확인하는 걸 도와줄 수 있냐 물었다. 소피의 아이패드로 투어 사이트에 문의하니 취소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다시 호텔 밖으로 나간다.


버스는 90분 만에 도착했다. 1시간을 기다린 투어는 취소되고, 1시간 30분을 기다린 투어는 취소되지 않았다니! 어쨌거나 나는 휴게실에서 자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한 잠도 못 잔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문 사이로 스미는 바람이 매서웠다. 소리는 더 공포스러웠다. 버스기사가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는 걸 보니, 2주 만에 운전 연수받고 렌터카를 빌리겠다던 내 포부가 어리석은 게 맞았군, 싶었다. 스코가포스, 블랙비치를 본 뒤에 새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깔끔하고 나름대로 고급스러웠지만 너무 추웠다. 창문에는 '바람이 부는 동안 절대 열지 마시오'라는 엄중 경고가 쓰여있다. 호텔을 뽑아낼 것처럼 바람이 불어댔다. 혹시라도 창문이 저절로 열려 날아갈까 봐 온 짐을 화장실에 밀어 넣고 배낭은 옷장에 단단히 묶는다.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정말로 그 지경까지 가게 된다.


저녁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추가로 돈을 지불해야 된다고 했다. 한화로 11만 원 정도의 뷔페였다. 가이드가 추가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니, 오해가 있었을 거라고 한다. 왠지 기분이 상해 저녁을 먹지 않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하루 종일 몸이 녹지 않아 바람막이와 플리스, 패딩, 등산 양말을 신고 잠이 들었다. 한두 시간 뒤 충분히 낮잠을 자고 저절로 눈이 떠질 때처럼, 나를 짓누르는 잠에서 스르르 빠져나왔다.


그토록 바랐던 아이슬란드에서의 밤을 이렇게 보낼 수 없지, 별이라도 보러 나가자. 온갖 방한 용품으로 무장한 채 호텔 밖으로 나간다.


한 곳을 쳐다보면 초점이 흐려질 정도로 별이 많은 날이었다. 고개가 아프도록 한참 별을 보다 이제 됐다 싶어 뒤를 돌았을 때 오로라가 있었다.


초록빛 오로라는 살아 있는 것처럼 기이하게 움직인다. 찰랑거리고, 흐르고, 다시 접혔다가 펼쳐지고. 그렇구나. 오로라는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나는 아이슬란드가 내어준 풍경을 올려다본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이태리인인 마르코였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앵글에 방해가 되는지, 내게 좀 더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움직여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이때다 싶어 내 핸드폰이 고장 났다고 사정을 설명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마르코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민다. 나는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며 빠르게 정확한지 확인한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오로라를 만끽한다.


추후 촬영 한 오로라 그림. 내 눈으로 보면 진짜로 움직인다


호텔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통창으로 오로라를 볼 수 있다. 온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서 오로라 쪽으로 돌아누워 잠 들 준비를 한다. 이런 호사가 있을까?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은 사라지지 않지만 반드시 흐려진다. 나는 살며 그걸 터득했다. 핸드폰이 고장 나 사진을 찍지 못하지만 이 순간을 도저히 놓칠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인간이 왜 그림을 발명했는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2분 만에 나는 인간이 왜 사진을 발명했는지 깨닫는다. 내가 그린 오로라는 나 말고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 그림을 보면 그날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침대에 누워 바라볼 수 있는 통창에는 오로라가 걸려 있고, 나는 오로라를 덮고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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