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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치의 의미

by Flywan


삶이라는 게 그렇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근준비를 하고 오전에 일하다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 일하다가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쉬다가 다시 잠이 든다. 사람이 사는 삶이 유한할진대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소비되는 시간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 일상들을 살다보면 가끔 사람이 사는 존재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대 시절,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시절에는 그러한 고민이 덜했다. 사람의 존재가치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배웠기 때문이고 그것이 옳다고 배웠으며 그래서 그렇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궁금증을 가졌던 것 같다.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의 내용이 세상의 모든 원리를 다 설명해주진 않는다. 성경 역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주장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직접 쓰신것이 아닌 사람의 손을 거쳐갔기에 오류투성이의 내용들이 많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이고 믿음이지만, 요즘에와서는 그러한 맹목적 믿음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결국 잘못된 신앙으로 연결되는 것도 깨닫는다. 의심과 질문없는 믿음은 모래성과 같기 때문이다.


우주는 존재한다. 가끔 뉴스기사나 글에서 읽어보면 우주의 크기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사는 지구조차도 거대한 우주의 세상속에 비춰보면 지극히 작은 점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작다.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와 같은 지구가, 생명체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광활한 우주의 공간 속에서 일정한 물리적 법칙아래 지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엔 어렵다.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역사로부터 계속 논쟁이 되어왔던 주제다.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무엇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는가. 철학이라는 학문의 시작은 이러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존재의 목적이 무엇일까.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답은 없다. 명쾌한 답이 없기에 기분은 우울하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언제나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늘 같다. 특별한일 없이 무사히 하루를 잘 보내길.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하는 것들이다. 무심코 길을 걸으며 바라본 파란하늘에 한껏 기분이 좋아지고 늘 듣는 음악리듬에 몸이 절로 반응을 하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모금을 목구멍에 삼키는 순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지는... 이런 일상들이 계속되는 순간을 기대하고 바란다. 그것이 지금 숨쉬며 살아가는 나를 기분좋게 만든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이러한 기분좋은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작은 일상에서 찾는 행복. 이러한 행복이야말로 삶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연찮게 로또라도 당첨되어 그동안 억눌렸던 소비욕구를 마음껏 폭발시키는 것이 이러한 행복이주는 느낌과 순간 같을수는 있다. 그러나 그 것이 주는 여운과 본질적인 느낌은 다를 것이다. 그러한 행복은 결국 공허와 외로움을 만들어낼 것이고 불안과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행복들은 다르다. 그것은 지극히 작고 크지 않는 울림의 감정들이지만, 그 여운은 길다. 잠시나마 지치고 힘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마법과도 같은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걸어가는 삶에 있어서 이렇든 저렇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 소소한 행복들이 하나 둘씩 모이다보면 어두운 삶의 영역을 조금씩 밝히며 넓어져 갈 것이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일어서게 만들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


지극히 작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나는 이것이 내가 집중해야될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영어책을 붙잡고 공부한다한들 그게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로또를 산다한들 그게 당첨된다는 보장이 있냔 말이다. 날씬한 사람들을 보며 살뺀다고 운동할거다 라는 거창한 목표와 초고속 승진하는 사람들을 보며 진급하겠다고 열심으로 공부에 매달린들 그게 나한테 맞는 옷이 아니면 뭘해도 시간낭비밖에 안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이러한 신기루같은 것을 쫓아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아지더라.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내가 해봤자 안되는 헛된 욕심이구나.



봄이다. 썰렁해진 마당 빈공간에 식물들을 채우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사러가는 것도 참 귀찮다.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나같은 의지력 박약아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작심하고 간다. 작심을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 한번은 가게 되어진다. 가보면 별 거 아니다. 어찌저찌해서 네다섯단의 철쭉들을 사다가 땅을 파고 심어둔다. 이런거 잘 하지도 못하고 지식도 없다. 그냥 파고 심고 물준다. 간격을 맞춘다고 했는데 삐뚤빼뚤이다. 역시 난 이런거 잘 못한다. 뭐 괜찮다. 잘 심어지기만 하면된다. 멀리서 바라보니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나무들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이제야 봉긋하게 올라오는 봉오리들을 보면서 얼마뒤 활짝핀 꽃들을 볼 생각에 흐뭇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좋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하늘도 파랗게 맑다. 어제 비가와서인지 뭉게구름이 빠릿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반팔 티셔츠 속을 타고 땀에 젖은 온 몸을 휘감고 간다. 그래. 이거다. 기분좋은 느낌. 행복이라 불러도 좋은 이순간. 나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내나이 40에 도달해서야 조금씩 느껴진다. 삶에 대한 욕심없이 지극히 작은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들을 모아모아 사는 삶.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복이란 것 말이다. 하기 싫으면 억지로 하지 않는다. 요즘 영어공부랍시고 20분짜리 미드 한편을 외워보자 해서 도전했다. 두달째 하고 있는데 이제 겨우 반절외웠다.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중간에 때려치고 그만할까 생각도 했다. 근데 뭐 어때. 세달이 걸리든 반년이 걸리든 1년이 걸리든 어때. 이거 안하면 당장 죽거나 난리가 나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가면 어때. 내가 하고 싶을 때 5분이든 10분이든 하면 되지. 남들이야 한달에 파를 하던말던 내가 알게 뭔가. 한에 독서를 한권도 안하든 말든 뭔 상관인가. 내가 읽고 싶을때 읽고 싶은 책 보면 되지. 인문학 같은 어려운 책 아니면 어때. 벌써 수십번을 읽은 슬램덩크 만화책을 보고나서 느끼는 전율과 감동을 또 느낄 수만 있다면 상관없지 않은가. 지금 이순간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남들이 생각하는 기준따윈 가볍게 무시해주고 내 느낌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의 삶을 살면 되지. 그렇다고 매일 그렇게 산다는 것도 아닌데 너무 초조해하고 나만 홀로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 내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가만히 멈춰서서 생각해보면 의외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올정도로 답은 간단하다.


나도 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민감하다는 것을. 내일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출근해야되는 사실이 존재한다. 당연히 죙일 짜증과 불만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럴땐 마당으로 간다. 어제와 다르게 변해가는 식물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아이컨택해서 지켜본다. 짧지만 그 순간만큼은 일주일 내내 가졌던 짜증과 불만은 사그러지고 기분좋은 느낌들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지극히 작은 일상에서 오는 행복. 그것이 지극히 짜증나는 삶의 불안고 불만속에서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삶의 에너지가 된다.



아직 허전한 마당의 공간들이 있다. 꽃 사다 심어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룬게 한달이 다되어 간다. 내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 뭐. 그래. 나는 그냥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다. 게으르고 싶고 뒹굴고 싶다. 걍 그런 존재다. 뭐 어쩌겠나. 그래도 계속 가야지가야지 하면 언젠가 한번은 가개 된다. 내일은 꼭 가야지. 아침 출근길에 마당에 핀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이 맛에 꽃을 심는거지. 심자. 내일은 꼭 꽃 사다 심자. 내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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