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아나운서

병원에서

마주한 죽음

by Sia

“엄마, 나 사실 아파서 내려왔어.”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 배가 너무 아프고, 밤마다 죽을 듯이 열이 났다가, 너무 춥기도 해."

나는 밥을 한 숟가락 떠놓고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말 아팠다. 밤에 잘 때마다 오한과 고열을 반복했고,

"최재연은 곧 죽을거야." "너의 삶은 이미 다했어" 와 같은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밤에 항생제와 진통제를 먹고나면 그래도 괜찮아졌고, 낮에는 조금 괜찮은 것 같아 하루, 이틀은 버텼다.

하지만 정말 더이상 견디기가 힘들어 병원에 갔었다.


“2차 병원에 가서 이것저것 검사 받았는데 임파선 쪽이 너무 심하게 부었대. 그래서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거야. 대학 병원 가서 이것저것 검사 받았는데 원인은 모른대. 그래서 엄마 있는데서 검사 받으려고 내려왔어. 좀 무서워서”

무섭다는 말에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무서운데 뼈는 어떻게 혼자 깎았어?‘ 라고 말하려는 거겠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엄마는 나를 쳐다보는 눈을 거두고 다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 후 옷을 입은 엄마가 무심하게 말했다.

“병원가자.”

엄마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모든 문제들이 최초에는 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시작하듯이, 병도 그랬다.

*

지루한 검사들이 이어졌다. 소변 검사, 혈액 검사, CT 촬영 등 검사들을 했지만 뚜렷한 원인을 밝히기가 어려웠다. 계속 항생제를 맞았다. 하루에 2-3번씩 열이 났다. 열이 한 번 나면 3시간 정도는 엄마와 나의 고군분투가 이어졌다. 열이 나기 전에는 손과 발에서 피가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한이 와서 담요를 덮고 전기장판을 켰다. 그러다 갑자기 열이 끓기 시작했다. 그러면 엄마는 열을 떨어뜨리기 위해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고 나에게는 얼린 페트병을 안고 있게 했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하고 나면 열이 떨어졌다. 그러면 간호사들이 와서 균 배양검사를 한다며 피를 주사기 10개 정도 뽑아갔다. 하루에 열이 3번 나는 날은 30번을 빼갔다. 열이 왜 일어났는지 세균 배양검사를 해야 해서다. 항생제 부작용으로 밤마다 부었고 나는 처음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나에 대해서 생각했다. 항생제를 그만 맞게 된 건 열이 떨어진 후 항생제를 맞다가 얼굴 경련이 왔기 때문이다. 그 때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얼굴을 보고 있던 엄마가 깜짝 놀라서 주사를 중단시켰다. 엄마는 진작 항생제가 문제라고 했었지만 의사는 ‘조금만 기다려보자’는 말만 해오던 터였다. 항생제를 중단하자 귀신같이 열이 떨어졌다. 엄마는 의사에게 몇 주간 내가 고생했던 거 어떻게 책임질거냐고 따졌지만 사과대신 교묘하게 피해가는 답변만을 내놓을 뿐이었다.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항생제가 열의 가장 큰 소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이런 식이었다. 고열의 원인이 꼭 항생제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여러 검사들을 받았는데 한 개의 검사 당 예상되는 원인의 병명이 붙었다. 어느 날은 임파선염, 어느 날은 임파선암, 어느 날은 결핵, 이런 식이었다. 의사들은 쉽게 병 이름을 붙였지만 나는 그게 한 발짝씩 죽음에 다가가는 수순인 것 같았다.

*

죽음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나는 아빠의 죽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내가 중 2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료 사고였다. 교통사고 후 수술을 받던 중 의사가 동맥을 잘못 자르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돌아가셨다. 모든 일들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우리 가족은 가장 보통의 아침밥을 먹으며 여느 수요일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는 여느 때처럼 8시에 출근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드라마에서는 수술실 문 앞에서 기다리지만 나는 병실 앞 의자에 앉아 동생과 카스테라 빵을 먹었다. 아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간호사들이 수술실을 급하게 왔다갔다하고 엄마의 무슨 일이냐는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약간 심장이 떨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실수’와 ‘최대한 노력’ 이란 단어를 들었다. 때로는 실수가 절대 용납이 되지 않는 상황이 있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걸 알 게 되었다. ‘최대한 노력’을 했는데도 ‘실수’를 만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 본 아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아빠를 볼 수 없었다. 아빠는 수술실에서 흰 천을 덮은 채 나왔다. 죽음은 그렇게 급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지만 엄마와 나, 동생은 잘 극복했다. 더 열심히 살고 많은 것들을 극복해서 우리 모두가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우리 집이 아빠가 있을 때도 잘 사는 것은 아니었다. 여느 가정이 그렇듯 약간의 빚과 근근이 살아갈 정도의 월급이 있었다. 아빠의 사망보험금으로 빚을 갚았고 남은 돈은 다른 집을 구하는 데 썼다. 엄마는 직장을 가졌다. 하지만 엄마 나이에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아직도 구체적으로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이제 엄마가 냉장고의 반찬들을 곰팡이 피게 할 만큼 피곤하고 고된 일을 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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