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칼의 노래 中 페이지 250>
나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표현이 나오면 연필로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내 책은 깨끗하지 못하다.
즐겨 읽은 책일수록 그렇다.
지난번에는 여기에다 줄을 그었는데, 다음에는 다른 곳에 또 줄을 긋는다.
어떤 책은 그은 밑줄이 하도 많아, 찍 그은 밑줄 옆에 날짜를 적어놓기도 한다.
다음에 다시 그 책을 펼치면 알 수 있다.
그때 나는 이런 문장을 좋아했구나...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연필을 들었다.
책이 온통 밑줄 투성이가 되어버릴 것 같아 들었던 연필을 놓았다.
그냥 읽자.
문장 하나하나가 다 섬세하게 날이 선 칼날 같은데, 여기다 어떻게 밑줄을 그을 수 있을까.
나는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생각나는 문장들을 다시 찾아 펼쳤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
...나는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나는 정치에는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p.28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텅 빈 바다 위로 크고 무서운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각사각사각, 수평선 너머에서 무수한 적선들의 노 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환청은 점점 커지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식은땀이 흘렀고 오한에 몸이 떨렸다.
저녁 무렵까지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나는 붓을 들어 장계를 써나갔다. 문장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런 의전상의 단어와 상투적인 어구를 끌어대며 장계를 지었다.
나는 장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p.53
스스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생명이 모질고도 신기하게 느껴져, 칼 찬 나는 쑥스러웠다.
-p.57
여기까지 쓰다가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혼자 앉아 있었다...라는 평이한 문장이 이토록 깊게 마음속을 파고드는 건 왜일까.
바다 위에서 군사를 이끄는 용맹한 장수가 아닌, 애끓는 마음으로 고뇌하는 무인이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