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것들

by 차분한 초록색

화요일

에라 모르겠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완고를 보냈다.

갑자기 할 일이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은 그렇게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더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목요일 오전

미루고 미루던 치과를 갔다.

막상 가니 별 거 아닌데.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차일피일 미뤘는지.


비는 어느새 그치고 맑은 하늘이다.


빌린 책을 반납하러 서점에 가서 괜히 책장을 기웃거린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시집 한 권이 정면으로 서서 나를 본다.


요즘 시가 유행인가?


서점에 시 코너가 새로 생긴 듯하다.

(그동안 내가 보지 못한 걸 수도 있다)


도발적인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시집을 손에 쥐었다.

휘리릭.

넘기다가

문득 한 줄을 읽었다.



나에게는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따듯하고, 축축하고 별 볼 일 없을 테지만...

- 시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흐음...

나에게는 써재낀 글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초라하고 볼 품 없고 오글거릴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 있고 술을 담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네가 있고...

- 시 <남아 있는 것들> 중에서-


흐음...

내게는 그래도 재미있다고 댓글을 남겨 주었던 한 줌 독자들이 있고 그걸 위안 삼아 또 써 내려가는

내 겁먹은 손이 있고 그 속에 은근한 오기가 있고...



나는 <남아 있는 것들>이라는 시 한 편을 읽으면서 그 사이사이 나를 대입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이리 와 봐.

이 시, 너무 좋지 않아?


아이와 남편에게 읽어주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불평할까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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