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아이의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원 재정비에 돌입한 지 한 달.
3년 동안 다니던 수학 학원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영어는 유지.
그리고 이제 국어에 발을 담그기로 했다.
국어 학원의 입학 레벨테스트를 보러 가기 일주일 전.
동네 서점에서 문제집을 한 권 샀다.
비문학 지문은 곧잘 푸는 아이였지만, 문학에는 조금 약한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문학 지문으로 나온 글이 김유정의 동백꽃이니.
얼마 전까지도 엉덩이 탐정이나 읽던 아직은 초등인 아이에게는 어려울 수밖에.
그래도 동백꽃 지문에 달린 6개의 문제 중에 4문제나 맞은 아이가 대견했다.
이어지는 지문들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해진 나는 문제집을 훑었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 있는 게 아닌가.
어? 이거 엄마가 좋아하는 시인데!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기형도 <엄마 걱정> 중-
참... 정말 시인은 다르구나.
해가 시들었대.
찬밥처럼 방에 담겨있대.
누렇게 바랜 벽지와 장판이 깔린 자그마한 골방 안에 앉아 있는 까까머리 소년이 떠오른다.
아무리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기형도 <엄마 걱정> 중-
배춧잎 같은 발소리라니...
내가 호들갑을 떨며 흥분한 사이, 아이는 문제를 다 풀었다.
문제> 위 시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1연의 '나'는 어린아이이고, 2연의 '나'는 어른이다.
2. '나'의 쓸쓸한 심정을 '열무 삼십 단'으로 표현했다.
3.....
4.....
5.....
아이가 고른 답은 2번.
왜 이게 아니라고 생각해?
'열무 삼십 단'은 엄마가 힘들다는 거 아니에요?
오, 제법인데?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책장으로 가 기형도 전집을 빼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 기형도 <노을> 중-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이 노을이었구나.
그는...
공기는 푸른 유리병이라고도 했었지.
차분한 초록색이 되기 전까지 나의 오랜 닉네임이었던, 공기는 푸른 유리병.
아이는 입학 테스트를 생각보다 잘 치렀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긁었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엄마(나)의 걱정은 그날, 해가 시들기 전에 사라졌다.
국영수 세팅은 끝났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