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라퍼를 꿈꾸다.
캘리그라피, 설렘으로 시작했지만 기타처럼 한 번쯤은 배워보고 싶던 분야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큰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나도 손글씨 예쁘게 잘 썼으면 좋겠다.' 정도였으니...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난 예술 쪽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소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생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할 때에도 '글로 생산자가 되어 볼까' 하는 생각정도였지, 예술분야 하면 떠오르는 미술에 견줄만한 캘리그라피로 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매주 1회 2시간 수업을 하며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그 매력에 스며들었고 캘리그라퍼라는 직업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찾아보니 무수히 많은 캘리그라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미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난 꿈도 못 꿀 일이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마음을 접었다.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글씨는 조금씩이나마 형태를 갖춰가는 듯했고 그렇게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 신기했다. 연습을 얼마나 하느냐에 실력이 나아지기도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연습에 게을러질 때면 또 정체되고 하는 것이 글씨를 쓰는 건 글을 쓰는 것과도 같이 내가 하기 나름이었다.
아무렴 글씨와 글만 그럴까, 세상만사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지겠지.
평일엔 퇴근해서 글쓰기에 빠졌고 주말엔 수업을 다녀오고 다시 연습에 매진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종일 업무와 집안일로 지친 심신을 일과 후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으로 힐링했던 시간들은 점차 글씨 쓰는 시간으로 새롭게 채워져 갔다.
매주 수업받는 작업실 공간을 보며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이런 공간에서 혼자 일하면 어떤 기분일까? 온전히 순수한 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좋은 싫든 출근하는 순간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씌워진다. 21년이라는 기간 동안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본연의 자아와 페르소나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비판적 사고를 못하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나의 태도도 한몫했을 테고...
부당하든 아니든 지시사항이 떨어지면 앞뒤 잴 것 없이 '네 알겠습니다.'하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었다. 쥐어짜면 짜이는 대로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 내며 해내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안도감을 더 크게 느끼기도 했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조직 그리고 타인에게 끌려 다니는 삶이더라. 물론 그 대가로 매달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았다. 그 월급 때문에 지금껏 잘 살았고 지금도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축에 속하며 어쨌거나 경제적인 풍요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젠 나도 그렇게 아랫직원을 이끌어야 된다고 한다. 팀장인 내가 마뜩잖은 일일지라도 조직이 원하는 것이니 부하직원에게 그리 하라고 지시를 해야 한다고 한다. 나도 납득하기 힘든 일을 팀원에게 시키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는 마음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면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게 맞나? 팀장의 역할에는 팀원의 역량을 키워주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을 터인데 지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내가 다 해버리는 것이 과연 팀원을 위한 일인가?
'끼인 세대'였다. 위로는 옛날 조직문화에 익숙한 상사를 모시고 아래로는 똑 부러지게 할 말 하는 MZ세대 부하직원 데리고 일을 해야 하는, 세대가 교체되고 있는 지점이 지금의 팀장들이다. 위아래로 맞춰야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속되는 고민의 해답은 찾지 못하고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만 커져갔다.
'나도 이런 작업실에서 혼자 일해봤으면 좋겠다."
눈앞에 보이는 것과 그 너머의 차이는 클 것이다. 그 차이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는 캘리그라피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이 눈덩이 처럼 커져만 갔다.
'일시적인 관심일 뿐이고 현실 도피처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껏 안정적인 삶을 유지했던 것처럼 살 수 있는데 굳이 왜??'
사십 대에 전혀 무관했던 분야에 도전해 보는 것, 그런 마음을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분야는 나와는 제일 관련이 없다고 단정 짓고 넘 볼 생각도 안 했던 디자인 쪽이 아닌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당장 어쩌겠다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실력도 한참 더 쌓아야 가능한 일이고...'
'일단 취미보다 좀 더 확장해서 넓게 받아들여볼까?'
꽁꽁 묶여 있던 생각들이 서서히 유연하게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불안과 두려움이 차지하고 있던 마음 한편에 설렘이라는 작은 씨앗 하나가 뿌려지고 싹이 움텄다.
퇴직준비는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퇴직 전 제2의 업에 대해 그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좋다고 했다. 시간은 충분하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을지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 나도 좋아하는 일하면서 살아보자. 거기에 돈까지 벌 수 있으면 금상첨화.
그래 까짓꺼 한번 해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