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음에 관하여

「에세」 39

by 루너

내가 살면서 맞닥뜨린 많은 문제들 중 가장 어려운 문제들은 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내 본연의 태도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상충하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라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날 옭아맬 뿐이라면, 차라리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몽테뉴 또한 그런 생각을 했던 듯하다. 이번 글은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을 예찬하는 글이다.


몽테뉴는 이렇게 지적한다. "인간만큼 상종하기 힘든 존재도, 상종하기 쉬운 존재도 없다. 전자는 악덕에 의해, 후자는 본성에 의해 그렇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처럼 악덕 근처에 있으면 벗어나기 힘든데, 우리 본성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좋은 대로 살려면, 즉 진정 홀로 있으려면, 본성을 극복해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속적인 것에는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아야 한다. 특히 명성을 쌓는데 골몰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학문을 한다면 오로지 자신의 현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여야지, 죽은 뒤에도 남을 저작을 위해서 학문을 하면 헛되다는 것이 몽테뉴의 견해이다.


나는 이러한 견해를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서 맛본 적이 있다. 그 소설에서는 괴테가 죽고 나서도 불멸할 자신의 명예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모습이 나온다. 괴테는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길 베티나라는 여인에게 골몰한다. 그러나 그 베티나가 자신에게 약속하는 불멸이 진정 괴테 자신의 불멸이 아니라 베티나가 베티나의 의지대로 창작하고 편집한 이미지의 불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괴테는 체념의 길로 들어선다. 이렇듯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서 행복한 삶을 산 자신의 이야기를 꾸미려고 애쓴다면, 결국 불행으로 귀결되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물질도, 죽은 뒤에 남는 것도 아니다. 오직 현재를 사는 마음이 중요하다. 모든 욕심으로부터 벗어나 아무 욕심 없이 그때그때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다.


나는 몽테뉴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세상을, 특히 현대의 세상을 살면서 맺는 관계들은 다수가 이익에 의해 맺어지는 것들이다. 내가 마음으로 진정 원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세상을 살기 위해 맺어야 하는 관계가 정말 많다. 이 관계들 속에서 내가 행복을 얻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불행할 때가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상대가 나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줄지, 나는 이 관계에서 얼마만큼 이익을 가질 수 있는지, 관계가 끝나고 나서 내 이미지가 어떻게 남을지를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괴롭힘 속에서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는 몽테뉴의 말은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는다. 자아는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무르익는 부분도 있다. 존재는 다른 존재에 비추어졌을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경지가 실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 자신을 온전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결국 관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알아야 한다. 더구나 모든 관계가 나를 악덕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분명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는 관계가 존재한다. 지금 내가 「에세」를 통해 몽테뉴와 맺는 관계 또한 그런 쪽일 것이다.


몽테뉴는 티불루스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홀로 있는 가운데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하나의 세계가 되어라." 나는 내면에 안식처를 꾸려 그 세계 안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늘 홀로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그대 자신의 세계와 그대를 둘러싼 세계를 왕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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