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번 글에서 공부에 지쳤던 이유가 반복 학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더 원초적인 관점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공부했을까? 공부는 모두에게 괴롭고, 나에게도 똑같다. 나는 왜 공부 말고 다른 대안을 찾아보지 않았을까? 내가 공부를 할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가 주는 성취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떤 자질을 타고났든 간에 학교에 간다. 논란이 있지만 같은 학년 모두가 시험과 대회로 경쟁한다. 모두가 참여하는 경쟁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큰 영광이다. 나는 자신을 보여주는 맛에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건방진 소리지만 제 잘난 맛에 살았다. 대학교에 와서는 평점과 석차 말고는 기회를 찾지 않았다. 물론 교내 대회나 프로그램은 충분히 많았지만, 그걸 한다고 알아주는 사람이나 그걸 해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딱히 없다. 어차피 취업의 시기가 다가오면 누구나 하는 것이니까. 결국 나는 공부보다는 학교에서 관심을 받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영향도 있다. 내가 누리던 기쁨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성과를 이루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셨고, 주변 친구들이 나를 신하처럼 칭송해 주었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하며 기뻐하는 것이 좋았다. 영원히 그들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나의 기쁨과 그들의 기쁨이 늘 겹쳐서 뻗어나가길 바랐다. 내 가치가 떨어진 지금 나는 그들의 애정이 부담스럽다. 나는 지금 상태로 그들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다. 부모님이 나를 믿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아들이니까, 사랑 하나로 믿는 것이라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는 지금 크나큰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데...
믿음의 영향도 있다. 성적은 철저하게 노력의 결과라고 믿었다. 대학 생활 말엽에는 족보를 가진 사람들과 경쟁하는데 실패했으니, 이제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때 나는 힘을 얻었다.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으니, 나도 괴로움의 끝에 무언가가 있으리라 믿었다. 내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공부할 수 있었다. 믿음이 나의 힘이었다.
한때는 공부가 진정 재미있던 적도 있었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세포에 관한 책을 읽으면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내 몸속에 도시처럼 정교하게 운영되는 소우주가 있다.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세포에 관해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마다 뛸 듯이 기뻤다.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기본을 다지는 과정에서 나는 질려버렸을 지도 모른다. 원래 기본을 닦는 일이 가장 단조로운 일이다. 기본을 배우는 일을 즐길 수만 있다면, 나는 다시 공부를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약해 보자. 자신을 증명하는 매력이 없어지고, 남을 기쁘게 하지 못하게 되고, 신념이 흔들리고, 공부의 형태 자체가 단순해지자 동기를 잃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