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 50
이번 글은 크게 두 주제로 나뉜다. 하나는 몽테뉴 자신이 「에세」를 쓰는 목적이고, 나머지 하나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인간관(觀)을 비교하는 것이다.
「에세」는 불어로 원래 시험(Essai)를 의미한다. 몽테뉴는 어떤 주제든 가리지 않고 다뤄서 자신의 판단력을 시험한다. 몽테뉴의 목적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각자가 좋을 대로 세상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하나하나의 사안이 고유의 무게, 척도, 조건을 가지고 있겠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영혼이 그것들에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의 치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죽음은 키케로에겐 끔찍한 것, 카토에게는 바람직한 것, 소크라테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중략) 인간의 단편 하나하나, 활동 하나하나가 그를 폭로하고 지적한다." 몽테뉴는 자신의 단편을 보려 한다. 결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이성적인 길에 자신이 실제로 걷는 길을 대조하는 것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검토 받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말을 전했다. 나도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목표를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만 생각할 뿐, 내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내 삶을 몽테뉴처럼 검토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기 마련인데, 내 내면이 아닌 외부의 것들만 생각했다. 몽테뉴의 말처럼 "각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의 행불행은 오직 우리에게 달렸다." 그래서 몽테뉴의 시도를 더욱 본받고 싶다. 자신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그것이 바른 길인지, 완성된 길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걷는 길을 끝없이 생각한다는 점이 대단한 것 같다.
두 번째 주제로. 몽테뉴는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비교한다. 전자는 사람을 허망하고 가소로운 것으로 여겨 사람들 앞에 나설 때면 언제나 비웃음을 머금었다고 한다. 후자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 동정하였고, 그 때문에 늘 슬픈 얼굴을 하고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고 한다. 몽테뉴는 전자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이 비참하다기보다 저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간 몽테뉴의 말로 보았을 때, 몽테뉴는 인간을 비일관적이고 아전인수를 좋아하는 약한 존재라고 생각한 듯하다. 몽테뉴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현자 이외의 인간을 낮잡아본 것 같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몽테뉴는 스스로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만의 특별한 조건은 우리가 웃을 줄 알면서 동시에 우스운 존재라는 것이다." 거울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많겠지만,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꾸미는 존재는 인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저열한 존재라도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나아지려는 의지가 있다면 언젠가 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인간을 경멸하기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끌어안아야 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결국 모든 것을 깨달은 죄수가 다시 동굴로 돌아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