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관하여

「에세」 65

by 루너

이번 글은 편지글로, 어떤 부인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한다. 시대적인 한계였는지, 아니면 몽테뉴 본인의 확고한 신념이었는지, 다소 남성에게 편향된 글이다. 그 점을 제외하면 재밌는 고찰이 담긴 글이다.


몽테뉴는 모든 생물에게 보편적인 법칙 둘로 '해로운 것을 피하는 본능'과 '자식에게 갖는 애정'을 든다. 특히 "남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은 그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서, 자식에게 보답 삼아 받는 사랑보다 부모가 주는 사랑이 더 크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한 타산적인 사랑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식이 아버지를 계속 찾아오게 하도록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자기가 지키고 있는 등의 행위가 문제다. 자식을 낳은 것은 물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금슬금 다른 안식처로 물러나는 것이 몽테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년이다.


자식에게 존경받기를 바란다면 유산을 미끼로 존경을 살 게 아니라 덕성으로 존경을 사야 한다. "내용이 충실한 물질은 타고 남은 재조차 값이 나갑니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폭력으로 주입한 존경은 일시적인 가짜에 불과하다.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자기가 더 이상 누릴 수도 없는 나머지 호사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그것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양도해야 합니다. 자연이 그에게서 사용권을 앗아 가니, 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필경 악의와 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어떤 이가 당한 일을 들었을 때,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즉시 나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 나는 어떤가를 봅니다. 그에 관한 일은 모두 내 일이 됩니다. 그가 겪는 일은 내게 경고가 되어 그 방면에 대해 각성시킵니다." 좋은 부모의 얘기는 모범이 되고,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의 얘기는 경고가 된다. 삶이 주는 신호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몽테뉴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고 있다.


다만 몽테뉴는 이 글에서 한계 또한 드러낸다. 생각은 본디 주관적이다. 머릿속에서는 갑론을박보다 합리화가 잘 일어나기 마련이다. 몽테뉴는 여성의 모성애를 과소평가한다. 몽테뉴는 자기 친자식들이 아닌 남의 자식들을 먹이는 유모들을 그 예시로 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몽테뉴는 유모가 영원한 유모가 아닌 점을 간과했다. 유모는 자식들에게 들이는 비용을 줄이더라도 사랑까지 영원히 줄이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서 친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을, 잠시 다른 아이를 맡았을 때 분배하는 사랑과 비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살피고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체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생각을 세상에 내놓아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도 만만치 않게 중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몽테뉴는 몸으로 낳은 자식만큼 이성으로 낳은 자식도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플라톤의 책이 영원히 남는 것이 그 예시라 할 수 있겠다. 몽테뉴는 자기가 낳은 저작을 자식만큼 사랑해서 저작이 핍박받자 죽음을 불사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그 거룩한 예시들에 감동을 크게 느꼈지만, 중심 주제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아 깊이 얘기하지 않고 이쯤에서 글을 마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명예포상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