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이다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by 러너인

"집은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IMF한파 속에서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아직 해고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척하는 이들. 하지만 집을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오다 보면 어느새 등산로 앞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양복을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에 오른다. 후회와 한탄, 분노와 서글픔을 곱씹으면서. IMF가 직장인들을 산으로 출퇴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7일 자 -

"집은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40대 중반, 번아웃 속에서 자신을 잃은 가장이다.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을까 봐 어디에도 힘든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주말마다 출근하듯 나오는 나. 하지만 집을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오다 보면 어느새 도서관 앞이다. 나는 이곳에서 애써 슬픔을 감추며 자리에 앉는다. 후회와 한탄, 분노와 서글픔을 곱씹으면서. 번아웃이 나를 도서관으로 출퇴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정승우 작가, 2020년 1월 17일 자 -

2025년 8월 4일. 용인 상현도서관에 휴먼북, 사람책으로 등록되었다. 퇴근길에 최종 승인이 나서 휴먼북 라이브러리에 올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5년 반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필름이 지나가듯 수많은 장면들이 머리를 스친다.

주말마다 갈 곳이 없어 도망치듯 다니던 집 앞 도서관. 독서하는 습관도 놓아버린 지 오래라 책을 들면 졸리고 피난소처럼 와있는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해서 자책하며 엎어져서 자다 깨다 멍하니 하루를 보내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엔 어린 학생부터 더 나이 든 어르신까지 시험, 자격증, 독서에 빠져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인강을 듣는 사람들 틈에서 스스로가 더 작아지곤 했다. 억지로 책을 꺼내 들었지만 읽히지 않았다. 책을 본다는 행위조차 배부른 일이 될 수 있음을 우울감이 치솟을 때 나는 알았다.

주중에는 출퇴근 버스 안에서 잠시 인공호흡을 하듯 숨을 쉬고, 주말에는 IMF때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산으로 출퇴근하듯 도서관으로 출퇴근했다. 책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이나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 무기력한 시간.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집으로 오는 거리가 마치 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향하는 사람 같았다.

몇 달을 그렇게 의미 없이 도서관에 출퇴근했을까. 어느 날 달리기를 시작했다. 재미나 살을 빼기 위해서가 아닌 그저 살기 위해서 움직였다. 만보 걷기를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나며 조금씩 걷고 뛰게 되고 달리면서 지워버린 나를 조금씩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잘 보일 사람도 없다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자신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더 깨끗하고 더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피하기만 하던 나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SNS를 시작하고 달리는 나를 셀카로 찍고 올렸다. 조금씩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가둔 그 도서관에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이 필요했다. 나보다는 가족이 최우선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일이 미안하고 낯설었다. 그게 가장이라고 믿었다.

중고거래사이트에서 14만 원짜리 노트북을 발견했다. 퇴물이라 여긴 그 물건을 누군가 사간다는 사실에 들뜬 판매자는 싱글벙글했지만, 내게 그 노트북은 보물이었다. 나는 그 보물로 아픈 시간들을 버티고 첫 출간을 위한 글을 쓰고 올해 3월 책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를 출간했다. 나는 아직도 그 낡은 노트북을 쓴다.

처음엔 글이 써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픈 감정들이 너무 생생해서 글로 풀어내야만 살 수 있었다. 주말이면 1시간 달리고 씻고 도서관에 와서 두세 시간 동안 인스타그램 피드에 글 하나를 썼다.

글을 쓰기 위해 달렸고, 달리기 위해 썼다.

쓰고 달리고 생각을 비워내는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치유되었다. 비록 비대면 소통일지라도 누군가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쓰고 소통하며 그때 배웠다.

나는 나를 가둔 도서관에서 다시 나를 놓아주었다.

5년 뒤 그 도서관에서 나를 사람책으로 등록했다. 그때의 나처럼 힘들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주고 싶어서. 도서관 5층에 앉아서 가슴으로 울던 나에게, 그런 너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

누군가 휴먼북을 신청하면 서로 시간을 조율하여 재능기부로 도서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책 대출. 직장인이라 평일엔 휴가를 내야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분이 계시면 최대한 나를 읽히고 싶다.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회복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회복하는 인간이 건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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