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 찍을 용기

by 러너인

화면을 확대했다. 그 사진은 달랐다. 힘차게 달려가는 역동적 포즈, 자신감 있는 포즈로 자신을 드러내는 당당함, 건강함이 물씬 풍기는 러너로서의 정체성을 한껏 담은 그의 시그니처 사진은 볼 때마다 눈을 사로잡았다. 어떻게 찍어야 저런 사진이 나올까? 선명한 하늘, 땀에 젖은 얼굴에 번지는 미소. 달리기가 주는 자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옆에서 러닝메이트가 찍어주나?”하지만 상상일 뿐, 부끄러워서 묻지 못했다.

러닝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러닝 측정 어플로 측정된 그날의 러닝 기록(날짜, 달린 거리, 페이스(pace: 1km를 달리는 데 걸린 시간)를 자신이 고른 사진 위에 입힌 사진이 러닝 인증사진이다. 사진은 늘 같았다. 꽃이나 하늘 같은 풍경 사진이나 핸드폰 갤러리에만 남아있는 얼굴만 커다랗게 나오는 어색한 셀카가 전부였다.


카페에 새 글이 떴다. 사진장인인 그가 올린 '00 셀카 교실'. 아니, 그 사진들이 다 셀카였다고? 전문 포토작가가 찍은 듯한 그 사진들이 혼자서 찍은 셀카였다는 사실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다. 강좌 첫날이라 많은 내용을 담기보다는 셀카가 잘 나오도록 돌이나 나무에 스마트폰을 거치하는 방법 정도만 간단히 적혀 있었지만, 나에겐 그간의 궁금증을 풀어준 반가운 글이었다.

셀카장인. 지금까지 그의 멋진 인증샷이 모두 셀카로 찍은 사진이라는 진실. 러닝메이트가 없어서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속상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가 준 가르침이 있었다. 사진도 홀로서기가 가능하다는 것. 조력자가 없어도 누구나 혼자 찍을 수 있다는 자신감. 타이머를 설정하고 자연 속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핸드폰을 비스듬히 거치한 후 여러 각도, 포즈를 연구하며 찍는다고 했다.

그는 글의 마지막에 '셀카 삼계명'을 남겼다.

하나. 찍을수록 늡니다.

둘. 쪽팔림은 잠시다.

셋. 포토스포츠(유료 스포츠사진 전문업체) 보고 있나!

​​달리 장인이 아니었다. 그의 꿀팁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났다. 그는 부끄러움을 넘어서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많이 찍고 버리는 사진이 많을수록 빠르게 나아진다고. 내친김에 바로 연습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달리기를 끝마치고 초췌한 몰골로 인증샷을 찍었지만, 굳이 달리고 나서 사진을 찍지 말고 달리기 전에 찍으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새로운 시도는 발상의 전환을 부른다. 서서 찍는 러닝사진은 난이도가 높았다. 처음이라 무난하게 앉아서 찍는 셀카부터 시도했다. 러닝 시작 포인트인 공원 입구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휴게공간에 자리 잡고 첫 셀카 연습을 시작했다.

일부러 평소보다 이른 새벽에 나왔지만,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부지런한 분들이 있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누군가 지나가면 괜히 스트레칭하는 척하다 멀리 지나가고서야 다시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셀카를 찍었다. 민망하고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테스트 후 찍은 결과물이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감사인사와 함께 카페에 첫 셀카 결과물을 올렸다. 셀카장인의 칭찬과 함께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댓글로 코치받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어느새 출근 전 새벽 달리기의 목적이 달라졌다. 셀카를 찍으려고 달리냐고 누가 물었다면 그땐 그렇다고 할 정도였다.


달리면서 무심히 지나치던 곳이 새로운 포토존이 되었다. 해가 떠오를 때 실루엣을 찍어보고 해를 크게 손으로 그린 하트 안에 넣고 찍어보기도 했다. 웃픈 실패작도 수두룩했다. 타이머로 5초 정도 맞춰놓고 멀리서 달려오는 사진을 찍다가 타이밍이 안 맞아서 아예 안 찍히거나 너무 늦게 찍혀서 얼굴이나 무릎이 사라진 심령사진도 많았다. 새벽에 나갈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오늘은 어느 새로운 장소에서 어떤 멋진 포즈로 러닝 셀카를 찍을까?' 높이 뛰는 점프샷을 찍기도 하고, 자동차 진입 차단봉이 눈에 띄면 높이뛰기 선수가 허들을 넘듯 연출사진을 찍기도 하고 역동적으로 무릎을 높이 차올리는 러닝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벽에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더 이상 삶에 찌든 수줍은 직장인이 아니었다. 포즈도 과감해졌다. 코로나 시기라 마스크도 용기를 주는 마법의 도구였다. 어떤 날은 30분 뛰고 연출사진을 찍느라 30분간 촬영을 할 때도 있었다. 요령이 생겼다. 역동적인 동작을 스냅사진으로 찍기보다는 동영상으로 찍은 뒤 원하는 장면을 캡처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카페 셀카장인의 수제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하. 내가 수제자라니.' 그날도 카페에 멋진 포즈로 힘차게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사진을 러닝 인증사진으로 올렸다. 비슷한 시기에 셀카를 연습하던 러너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잠시 우쭐해하고 있는데 셀카장인의 댓글이 달렸다. "수제자 승우님! 앞으로도 계속 찍으실 거죠?"

"네. 셀카를 찍으면서 달리니까 러닝이 더 재밌어졌어요. 전에는 달리다가 중간에 멈추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지금은 달리다가 사진 찍기 좋은 곳을 만나면 잠시 멈춰 서서 셀카를 찍어요. 사진을 찍느라 유심히 살펴보니 공원에 예쁜 곳이 많더라고요."

"승우님, 혹시 인별도 하세요?" "네? 인별이요?" "네. 인스타그램이요." "그런 건 연예인들이나 하는 게 아닌가요?" 그가 당황한 듯 말을 이었다. "저도 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찍은 사진을 똑같이 올리시면 돼요. 이왕 사진도 찍으시니 인별도 도전해 보세요." "에이, 다 늙어서 제가 무슨..."


처음엔 그의 인별 도전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젊고 예쁜 사람들이 많은 SNS라니. 40대인 내가 끼어들 자리 나 있을까? 많은 사람들 앞에 나를 보여주기도 부담스러웠다. 블로그와 카페에서 소통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 밤,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한낮 셀카장인의 권고가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인별? 나도 한 번 인스타그램에 도전해 볼까? 해보고 못하겠으면 바로 그만두면 되니까."


인스타그램 앱을 깔았다. 새벽에 달리러 나가다 아파트 입구에 앉아서 찍은 사진을 첫 피드에 올렸다.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셀카 덕분에 인스타그램 첫 도전에 성공했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느낄 수 없었던 뜨거운 실시간 반응을 인별에서 처음 경험했다. 셀카에서 시작된 내향인의 작은 도전은 세상에 나를 드러낼 용기를 선물했다. 셀카를 찍다 보니 셀프 이미지가 바뀌고,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과의 관계도 변했다. 제는 여행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별 같은 사람들이 모인 새로운 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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