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산업현장에서 한 청년이 목숨을 잃은 뉴스 기사에 누군가 댓글로 시를 써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댓글 시인 ‘제페토’. 그분의 닉네임이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마스크로 입을 가린 사람들은 마음까지 가려버렸다. 점점 좁아지던 관계의 문도 결국 닫혔다. 달릴 때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새어 나왔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질식할 것 같은 나날들. 주위에 아무도 없는 듯한 진공의 시간. 책임만 남은 40대 가장의 숨죽인 하루가 있었다.
트리거처럼 번아웃을 촉발시킨 사건과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투명인간이 된 듯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 달리기를 만났다. 나는 완전히 달리기에 빠졌다. 눈에 보이는 성취가 좋았다.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냐는 비난의 목소리도, 왜 그렇게 사냐고 비아냥대는 내면의 심판관도 달릴 땐 소리를 멈췄다. 오디오북을 들었다. 긍정확언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을 달리며 주위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악을 쓰며 큰소리로 따라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 말을 따라 할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내 안에 눈물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다행인 것은 내가 여전히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관계의 문이 닫힐수록 세상을 향한 도전의 문이 열렸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계속 열리는 회전문처럼, 번아웃은 나를 달리기라는 낯선 세상으로 떠밀었다. 셀카가 인스타그램으로 가는 문을 열었고, 브런치에 연거푸 낙방한 아픔은 인스타그램에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선물했다. 뒤늦게 시작한 인스타그램에서 수줍게 전신사진을 올린 뒤, 피드에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팔로워는 거의 없었지만 사진을 올리면 누군가는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허공에 대고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카페는 그보다 조금 나았다. 누군가 댓글을 달고 답글로 소통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단점도 있었다. 대화라기보단 편지를 띄워놓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 같았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화면 너머의 누군가라도 내 글을 읽고 미소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그램은 달랐다. 좋아요 몇 개뿐인 미약한 반응이었지만 실시간이었다. 대부분이 러너들이라 가벼운 소통이 자연스러웠다. 자신을 드러낼 필요 없이 러닝 인증사진을 올리고 서로 응원하면 충분했다. 파워블로거가 되겠다고 100만 원을 허공에 뿌리며 억지로 긴 글을 써야 했던 의도적인 글쓰기에 지친 마음이 그곳에서 처음 위로를 받았다. 글쓰기 장인들이 모여있는 브런치에 두 번 미끄러진 상처받은 글쟁이에게 인스타그램은 말 그대로 기회의 땅이었다. 글을 안 써도 그만이었다. 그냥 ‘#오운완’ 세 글자면 끝이었다. 즐겁게 뛰고 사진만 잘 찍으면 글은 아무렇게나 써도 괜찮았다. 긴 글을 쓰는 사람도 그걸 읽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러너들은 긴 글을 읽거나 댓글을 길게 쓰지 않았다. 눈으로 읽고 지나가며 하트를 눌렀지만 댓글은 드물었다. 쓴다 해도 '파이팅' 정도였다.
백일장 같은 브런치에서 연달아 거부당한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인스타뿐이었다. 글을 못써도 괜찮았다. 서로 응원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운동인이고 러너였다. 너도 나도 안 쓰니 서로 편했다.
어느 날 게시글을 읽다가 긴 댓글 하나에 눈이 멈췄다.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댓글이었다. 댓글에 담긴 따뜻한 위로의 단어가 내게 닿았다. 그들을 모르는 내가 홀린 듯 그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사진만 올리는 줄 알았던 인스타그램에서 진정성 있게 긴 댓글을 쓰시는 분은 처음 만나서 감동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내 댓글에 장문의 댓글로 감사를 표했다. 나도 다시 긴 댓글로 그에게 답글을 달았다. 그와 나는 돌림노래처럼 긴 댓글 릴레이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누군가의 피드 댓글창에서 뜨겁게 첫인사를 나눴다. 그는 세심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이후에도 댓글로 펜팔 하듯 생각을 나눴다. 서로가 비슷한 결의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자 팔로우하고 dm으로 수다를 떨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스타에서 종종 긴 댓글을 썼다. 어느 날은 댓글 하나를 쓰는데 20~30분이 걸렸다. 특히 아픈 사연이 있거나 위로가 필요한 글을 만나면 잠시 멈춰서 그의 평소 글을 가만히 읽었다. 메모장을 열어 한참 동안 마음을 담은 댓글을 이리저리 고쳐 썼다. 그렇게 완성한 댓글을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듯 그의 글에 댓글로 붙이곤 했다. 누군가의 온기가 그립고 위로받고 싶었다. 현실은 나의 마음과 같지는 않았다. 받을 수 없다면 주기라도 하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위로받고 싶은 댓글로 누군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 글쓰기도 쉽지 않았지만, 달리는 거리가 늘어날수록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어느 날부터 공개적으로 감사일기를 썼다. 매일 세 가지 이상 감사할 일을 찾아내어 인스타에 올렸다. 착한 척하는 사람처럼 나를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인간관계 때문에 아픈 날에는 잘 연출한 러닝 셀카 인증사진 뒤에서 조용히 글을 올렸다. 아픈 이야기를 고백하듯 담담하게 썼다. 누가 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왜 그렇게 달려야 하는지, 왜 달리면서 울고 웃었는지. 달리기가 내겐 어떤 의미였는지. 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바이런 케이티의 책을 필사하며 나를 치유하는 글을 썼다. 브런치였다면 쓰지 못했을 글이었다. 나이 들어 시작한 달리기 예찬, 뒤늦게 맞이한 홀로서기의 시간들. 좁은 방에 앉아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던 날들, 주말이면 도서관으로 피신하듯 숨어들던 삶.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기 위해 한 걸음씩 달려가고 있다고 썼다. 어느새 내 긴 글을 읽으러 오는 인친들이 생겼다. 아픔을 댓글로 다독여주고 조용히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는 장점이 하나 있는데... 승우님이 딱 그래요. 승우님은 꼭 책을 내셔야 해요." 어느 인친이 적어놓은 댓글 하나가 가슴에 별처럼 박혔다. 인별에 기대어 하루를 견뎠다. 조금씩 글로 자신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다 보니 나를 드러낼 용기가 생겼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애써 피하며 살아온 소극적인 내가 어느새 인별을 넘어 진짜 사람들과 어울릴 용기를 낸 것은 달리기와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달리기를 배워보기로 했다. 누군가와 함께 달린다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예전엔 엄두도 못 냈던 도전이었다. 러닝클래스에 다니면서 변화가 생겼다. 훈련 때마다 찍어주는 사진과 영상 덕분에 애써 셀카를 찍을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은 훈련이 끝나고 무슨 이야기를 인스타에 올릴까?' 사람들과 달릴 때 드는 생각과 상황에 맞는 소재를 찾고 쓰면 되니 글쓰기가 더 즐거워졌다. 사진을 보면서 연장되는 장면을 연결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글을 써보는 재미도 생겼다.
러닝 클래스 매니저님이 내가 쓴 운동 후기와 글을 좋아해 주셨다. 만날 때마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냐고, 승우님 글을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해 주셨다. '처음엔 내가 무슨...' 하는 생각도 했지만, 매주 훈련하러 갈 때마다 항상 응원을 듣다 보니 자신감이 커졌다. 하지만 책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책은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글쟁이들이나 쓸 수 있는 전가의 보도 같은 거라 여겼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글자 수 제한이 있을까? 언젠가 긴 글 뒷부분이 잘렸다. 게시글은 2,200자가 한계다. 작은 분량이 아니다. 일부러 수련하듯 글자 수를 꽉 채워서 썼다. 장거리 마라톤 훈련처럼 긴 글을 쓰는 훈련이다. 잘 닦여진 브런치라는 아우토반에서 차를 몰 수 없다면, 비록 시골길 같은 인별이지만 내 마음대로 안전하게 글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보기로 했다.
인스타 팔로워 수가 2,000명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매일 인스타에 긴 글을 쓰는 일이 점점 익숙해졌다. 글마다 어울리는 제목을 붙여주려 애썼다. 에세이 한 편을 쓰듯 달리며 느끼고 배운 것들을 적었다. 인별의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며칠 후 병원에 입원해야 하니 휴가를 내고 함께 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순간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전화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새로운 이야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