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이 없다는 말 하지 마라

by 러너인

우연히 인스타그램 글 하나를 보았다. 이슬아 작가님이었다. '일간 이슬아' 구독신청 이벤트였다. 원래라면 이미 마감을 했어야 하지만 뒤늦게 나타난 신청자분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하루 정도 더 연장했을 때, 나도 행운의 막차를 탔다. 이슬아 작가님의 전설의 이메일을 20일간 매일 받아볼 수 있는 기회라니 놓칠 수 없었다.

정신없이 바빴다. 마지막 원고 수정, 작가소개, 사전 홍보 등 출간 준비로 메일함이 쌓여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3월 17일 예약판매가 시작되자 연일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스레드에 책을 홍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출간 임박 즈음 오디오북 지원사업 기획서를 내고 출간 후 한 달이 되던 날 사업에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오디오북 낭독자로 조심스럽게 한 분을 떠올렸다. 달리기 습관을 키울 수 있는 런데이 앱을 알려준 뮤지션 요조님. 5년 전 달리기에 처음 빠졌을 때, 유튜브 영상에서 요조님의 달리기 예찬 영상을 보고 영상에 소개된 런데이 어플을 깔고 달리는 습관이 몸에 붙었다. 새벽마다 요조님 노래 1시간 모음집을 들으며 달렸다. 하지만 그분께 나는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분과 친분도 없었다. 그저 올해 책이 나오기 전 팬심으로 서울 책방무사 오픈 전에 책모임과 북토크에 두어 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대문자 I 내향인이지만 용기를 냈다. 마침 제주에 있던 책방 무사가 문을 닫고 4월 말 서울에서 새롭게 오픈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책방에 들러서 책도 사고 인사드리기로 했다. 막상 책방에 가서 요조님을 뵈면 아무 말도 못 할 수도 있지만, 정 안되면 책이라도 몇 권 사고 오기로 했다. 일단 무작정 내 책을 챙겨서 출근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괜히 가서 망신이나 당하지 말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그분은 뮤지션이고 평소 작품성이 있는 책 위주로 낭독하셨는데 네가 쓴 달리기 에세이에 관심이나 있겠냐고.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어도, 직접 기획서를 써 오디오북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충분히 자격은 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오디오북 작업 일정 상 지금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내가 따로 낭독자를 모시기는 어려웠다. 성우를 내가 직접 추천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출판사 대표님께 연락이 왔다.
"오디오북 제작은 창비 스튜디오와 진행하려고 합니다."
"벌써요? 알겠습니다. 대표님께 하나 여쭤보려고 합니다. 제가 예전부터 가수 요조님이 낭독하는 오디오북을 자주 들으며 뛰었습니다. 책 프롤로그에 썼던 김현아 작가님 오디오북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도 요조님 목소리로 들었거든요. 이번 달부터 책방 무사를 서울에서 운영하고 계시더군요. 요조님을 제 책 오디오북 낭독자로 모시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분을 낭독자로 모실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제 버킷리스트라 되든 안 되든 한 번은 제대로 여쭙고 싶습니다. 얼마 전 책방 모임에서 스치듯 뵙고 인사드리긴 했지만, 오디오북 지원사업이 선정되기 전이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작가님이 전부터 개인적으로 요조님과 친분이 있으셨나요?"
"아니요. 전혀요. 다만, 제가 4년 전 유튜브에서 요조님 영상을 보고 런데이 어플을 알게 되어 본격적으로 달리기에 빠졌거든요. 그분도 달리기를 좋아하시니 혹시라도 이 책에 관심이 있지 않으실까 해서 먼저 대표님께 상의드립니다."
"네. 낭독자는 대체 가능합니다. 작가님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분이 직접 녹음해 주시면 더 좋지요. 섭외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문의해 보세요. 작가님이 섭외하시는 분으로 대체 가능합니다."

희망이 생겼다. 달리면서 한 번도 내가 달리기 에세이 책을 낼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고, 달리면서 요조님의 노래와 오디오북을 자주 들었어도 내가 직접 쓴 책을 그분의 목소리로 녹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달리기 에세이로 책을 내고, 오디오북 지원사업에 선정되자 조금씩 그 꿈을 현실로 가져올 용기가 났다.

3일이 지났다. 내 책을 항상 가방에 넣어두고 있었다. 4월의 끝날 출근해서 일하다가 오늘은 꼭 책방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차를 내고 수원에서 신촌으로 향했다. 가면서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취준생이 면접을 보러 가는 것처럼 떨렸다. 그냥 접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계속 올라왔지만, 일단 용기를 냈으니 끝까지 해보자고 다독였다. 말이라도 꺼냈으면 나중에 후회는 안 할 테니까.

지하철역에 내렸다. 이제 걸어서 5분, 책방무사가 코앞이다. 심장소리가 귀에 들릴 듯했다. 더 가까이 갈수록 떨릴 테니 내 책에 싸인과 몇 줄 글을 적을 기회는 여기뿐이다. 지하철 의자에 앉아 내 책 앞표지에 이렇게 적었다.
​"요조님께. 미운 제가 싫어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삶이 어둡고, 새벽마다 눈시울이 젖던 날들.
요조님의 낭독과 노래를 들으며 뛰었습니다.
달리기가 두 발로 쓰는 기도였던 그때,
요조님의 목소리는 조용한 위로가 되었고
덕분에 이 이야기를 끝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 존경과 고마움을 담아 이 책을 드립니다.
저의 이야기와 요조님의 목소리가
또 다른 시간 속,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조용히 닿아 이어지길 바랍니다.
​ - 2025년 4월의 끝날, 승우 드림."

요조님께 드릴 내 책에 내 마음을 써서 전했다. 지하철 의자에 앉아 책을 열고 표지를 열고 왼쪽 손으로 받쳤다. 펜을 꺼내어 책표지 오른쪽 여백에 손 편지를 썼다. 자꾸 손이 떨렸다. 책에 볼펜똥이 묻을까 걱정되어 쓸 때마다 손목에 볼펜을 닦았다. 글을 쓰고 나니 왼쪽 손목에 북두칠성 별자리가 생겼다.

잠시 후 책방에 도착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요조님은 책방에 안 계셨다. 책방을 둘러보며 책을 몇 권 샀다. 자리에 계신 친구 분께 계산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최근에 달리기 책을 한 권 냈는데요. 요조님 덕분에 4년 넘게 달리는 러너가 되어 책까지 쓸 수 있었거든요. 마침 오디오북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오디오북 제작이 가능해서요.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분이셔서 제 책을 낭독해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요. 어떤 책인지 보실 수 있도록 가져왔어요."
"비즈니스 관련 내용은 메일로 주시면 검토하실 것 같아요. 여기 명함에 있는 주소로 보내주시면 되세요. 참, 방금 말씀 중에 오디오북 지원사업이 어떤 건지 궁금하네요."
"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매년 오디오북 제작을 원하는 출판사 작품 중 작품 우수성과 기획성을 기준으로 선정해서 오디오북 제작비를 일정 금액 지원해 주는 사업이에요. 제 책이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높은 경쟁률을 뚫고 1차 지원사업에 선정되었거든요. 혹시라도 책 내용에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는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작가님. 요조님께 이 책 꼭 전달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많이 떨렸는데 용기 내서 왔어요. 바쁘시겠지만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도망치듯 책방을 나왔다. 여기까지 용기 낸 자신이 대견했다.

책을 드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5월 연휴기간이었다. 제안서를 쓰기로 했다. 하루 종일 제안서를 썼다. 쓰면서 수차례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5년 전 유튜브 영상에서 시작된 요조님과의 댓글 인연과 달리는 인생의 시작, 러닝에세이 책 출간, 오디오북 지원사업 선정과 낭독자로 요조님을 모시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다. 끝으로 이 책이 오디오북 지원사업에 선정된 객관적으로도 괜찮은 책이니 낭독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제안서를 훑어보았다. 왜 낭독을 부탁하게 되었는지와 얼마나 요조님의 목소리가 나의 달리기와 이 책에 큰 의미가 있는지를 잘 담은 것 같았다. 마치려다가 한 달 전 구독신청했던 이슬아님의 '일간 이슬아' 메일이 생각나서 열어보았다. 스무 개 메일 목록 중 에피소드 하나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마금지-돈 얘기를 언제 꺼낼 것인가"
​아찔했다. 내 제안서에는 가장 중요한 돈 얘기가 빠져있었다. 쓰지 않으려는 건 아니었지만, 진심이 닿기도 전에 처음부터 돈이야기를 꺼내기가 민망했다. 낭독에 긍정적인 응답을 받으면 두 번째 메일에 쓰려고 했었다.

이슬아 작가님은 단호하게 적었다.
"우리는 노동의 대가를 모르는 채로 일하지 않는다. 돈 얘기는 빠르고 정확할수록 좋다. 살면서 한 번쯤은 누군가를 섭외하여 일을 의뢰할 상황이 온다. 당신이 의뢰인이라면 첫 번째 섭외 메일에서 돈 얘기를 해야 한다. 너무 중요하기에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돈 얘기는 반드시, 첫 번째 섭외 메일에서 해야 한다. 두 번째나 세 번째는 안 된다. 돈 얘기가 시작되어야 하는 장소는 첫 번째 메일이다. 물론 담당자님께서는 상대가 수락한 뒤에 돈 얘기를 논의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잊지 말자. 섭외 조건을 모르는 이상 수락도 거절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상의해야 할 자세한 이야기가 바로 돈 얘기다. 적혀 있지 않으면 내 쪽에서 귀찮음을 꾹 참고 물어보게 된다.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이상 이미 한 번은 실패한 섭외다.
-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 p.89~91, 이슬아 지음"

이슬아 작가님의 송곳 같은 글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빠진 이야기를 꼼꼼히 적어서 메일을 보냈다. 그 뒤 출판사와 요조님과 여러 번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쉬운 일은 없었다. 고비마다 간절함과 결단이 필요했다. 하나씩 풀어나갔다. 내가 원한 일이니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주도해야 했다. 책방 오픈 후 다양한 일들로 바쁜 요조님이 시간을 낼 수 있는지도 관건이었다. 2주가 지났다. 그날은 5월 14일이었다. 나는 교육출장으로 제주도에 있었다. 오디오북 낭독자로 요조님을 떠올리고 달려온 지 거의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출판사에서는 어려우면 일반 성우분 중에서 목소리를 듣고 정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그럴 마음은 없었다. 답답할 때 나는 이런 글로 내게 용기를 주었다.


간절함이 없다는 말 하지 마라.
나와 너는 언제나 간절했다.
간절함이 46세에 러너가 되게 했고,
간절함이 새벽을 달리게 했고,
간절함이 4년 넘게 sns에 나를 쓰게 했고,
간절함이 4수한 브런치보다 먼저 출간하게 했고,
간절함이 내가 나와 있는 시간을 사랑하게 했고,
간절함이 혼자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뛰게 했고,
간절함이 숨던 나를 쉼 없이 100km 달리게 했고,
간절함이 외로울수록 세상 속으로 연결되게 했고,
간절함이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쓰게 했다.
간절함이 밤새워 오디오북 지원서를 쓰게 했다.

이제 나는 안다.
간절함이 없어서 45년간 힘들었던 게 아님을.
간절함이 없어서 빈 메일함을 마주한 게 아님을.
간절함이 없어서 원하는 결과를 못 이룬 게 아님을.
간절함이 없어서 꿈꾸던 관계를 못 만든 게 아님을.
간절함이 없다는 말 하지 마라.
너와 나는 언제나 간절했다.


교육을 듣고 있는데 새 메일 도착 알림이 떴다. 그토록 기다리던 메일이었다. 투고 후 출판사 메일처럼 떨렸다. 요조님이었다. 제안대로 진행하시겠다는 답장이었다. 그날 저녁 못 마시는 맥주 한 캔을 비웠다. 영화 필름처럼 5년의 시간이 스쳐갔다. 추운 겨울 캄캄한 새벽, 요조님이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으며 달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안도로를 달렸다. 달려야만 하는 날이었다.

지난 4년간 품었던 소중한 꿈에 요조님의 따뜻한 응답을 받았다. 나의 첫 달리기 책을 요조님이 오디오북으로 읽어주시기로. 걷지도 않던 5년 전의 내가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겠다는 말처럼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풀코스를 넘어 울트라마라톤까지 뛰고 책을 출간한 모든 일이 예전의 내가 꿈꾸지 못한 기적이니까.


멈추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난다. 요조님이 내 꿈을 들어주었듯, 언젠가 나도 간절한 누군가의 소중한 꿈을 이뤄주는 기적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어 보답하겠다고 아무도 없는 새벽, 사려니길 숲 속에서 나에게 약속했다.

25년 5월, 책을 낸 지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

sns에서 출간작가들의 북토크 소식이 들렸다. 다들 책을 내고 바로 북토크부터 여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조급해지고 부러웠다.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keyword
이전 23화계속 떨어진다면 방법을 바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