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떨어진다면 방법을 바꾸세요

오디오북 지원사업 합격 기획서 공개

by 러너인

'오디오북 지원사업'을 검색했다. 2025년 1차 신청 안내가 맨 위에 떴고, 다년간 사업에 참여했다는 제작사 프로필과 연락처가 있었다.
‘전화해서 뭐라고 하지? 이번이 처음인데, 계획서에서 뭘 중점으로 써야 붙는지… 그걸 그냥 물어봐도 될까?’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멈추자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디오북 제작사 OOO입니다. 어디신지요?"
"저... 올해 3월에 에세이를 출간한 저자예요. 오디오북 지원사업 계획서를 처음 쓰는 중이라 궁금한 게 많아서요.”
"어느 출판사시죠?"
"출판사는 아니고 저자예요. 제가 직접 계획서를 쓰려고요."
"어떤 부분이 궁금하신가요?"
"처음이라 감을 못 잡겠어요. 유념해서 써야 할 포인트가 있다면 그쪽으로 집중해 보려고요. 혹시 힌트를 조금만 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님, 출판사랑 저희가 먼저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선정되시면 저희와 제작을 하셔야 하니까요. 일단 출판사명을 알려주세요.”

그 말에 순간 주춤했다. 대표님과 상의 없이 제작사와 먼저 논의하는 게 맞을까. 결국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얻은 건 없었다. 마감은 3월 25일 월요일. 퇴근 후엔 예약판매 글 올리고, 댓글 달고, DM에 답하다 보면 정신이 없었다. 남은 건 주말 이틀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부터 접수 방식이 바뀌었다. 실물 도서 우편 접수가 사라지고, 요약 기술한 ‘트리트먼트’로 대체된다는 공지가 떴다. 다섯 장 안에 오디오북으로 들었을 때 가장 힘이 되는 장면을 추려 설득해야 한다. 트리트먼트 작업이 핵심이었다. 실물 책이 아니라면 결국 요약본에서 판가름 난다.

주말에 운동을 다녀와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내용이 있는지 검색했다. 누군가 올려놓은 오디오북 지원사업에 선정된 지원서 파일이라도 없을까 해서 눈 빠지게 몇 시간 동안 검색했다. 다른 분야 심사위원이 쓴 글이 눈에 띄었다.

"내 책이 계속해서 지원사업에 떨어진다면 지원서 쓰는 방법을 바꿔보세요." 심사위원은 책이 아니라 지원서를 본다고 했다. 매년 오디오북 지원사업엔 1년에 천 종이 넘게 신청되고 선정되는 건 고작 삼백여 종. 다들 출판사에서 좋은 책을 앞다투어 신청한 결과니 숫자만 들어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만했다. 게다가 심사위원 한 사람에게 배정되는 책이 몇백 종씩 된단다. 1차 심사 시간은 네댓 시간뿐. 계산해 보면 한 권에 1분도 못 쓰는 상황이다. 그러니 책을 다 들여다볼 시간 자체가 없고, 결국 지원서 한 장이 이 책의 운명을 결정하는 셈이다.

심사 구조를 보니 더 확실해졌다. 1차 심사에서 개별 평가를 하고 점수를 합산해 2차로 올리는데, 2차에 가면 1차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책이 80~90% 그대로 통과된다고 했다. 그러니 1차에서 눈에 안 들어오면 끝이라는 얘기였다. 그럼 심사위원들은 뭘 보고 판단할까. 먼저 확실히 붙일 책과 확실히 떨어뜨릴 책을 가른단다. 당연했다. 수백 권을 다 들여다볼 수 없으니 탈락시킬 이유가 보이는 지원서는 초반에 바로 걸러낼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지원서엔 공통점이 있었다. 유통사 책 소개를 그대로 복붙한 지원서. “완벽한 작품이다”, “누구나 읽으면 끝까지 본다” 같은 추상적인 말만 가득한 지원서. 정작 책이 무슨 책인지, 왜 특별한지 감이 안 잡히는 지원서. 이런 건 더 볼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까. 글에서 강조한 건 두 가지였다. 책 내용의 구체성과 오디오북 기획의 현실성.

책 소개는 구체적이어야 했다. 출간기획서처럼. 이 책이 다루는 주제와 독자 타깃을 명확하게 쓰고 판매 실적이나 수상 내역, 추천사, 작가 경력 같은 객관적인 근거도 간결하게 정리하고. “완벽한 작품”이라는 말 대신 숫자와 사실로 설득하라고 했다.

오디오북 기획서도 마찬가지였다. “AI 시대에 오디오북이 중요하다”는 식의 식상한 문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대신 성우를 차별화해서 몰입감을 주거나, 배경음악과 효과음을 활용해 극적인 장면을 살린다거나, 표나 차트 같은 시각 자료를 음성으로 풀어내는 방법까지 확실히 차별화될 수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쓰라는 거였다. 제작 과정에서 멀티트랙 음향 편집을 활용하겠다든지, 모바일 최적화 같은 기술적 포인트를 보여주면 더 좋다고 했다. 한마디로, 내 오디오북이 다른 오디오북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그걸 짧고 굵게 보여주라는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며 지금까지 끄적거린 지원서 초안을 다시 살펴보았다. 마치 책 소개글처럼 흔한 내용이었다. 감동적인 스토리, 책의 의미, 작가의 여정을 잔뜩 담았지만 정작 심사위원이 원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구체성, 객관성, 차별성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 형광등처럼 머리가 반짝였다.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했다. 책의 주제와 독자 타깃을 분명하게 적고, 객관적인 근거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성우와 음향, 스크립트 같은 내가 만들려는 오디오북만의 차별화 요소를 확실하게 보여주기로 했다. 그의 마지막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내 책이 계속해서 지원사업에 떨어진다면 지원서 쓰는 방법을 바꿔보세요."

심사위원 눈에 1분 안에 들어오는 지원서를 쓰기로 했다. 이제는 지원사업 선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100km 울트라 마라토너이자 20년 차 기획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밤새 오디오북 지원사업 지원서를 다시 썼다. 나의 온 정신을 쏟아붓고 모든 걸 걸었다. 아래 내용이 실제로 내가 다시 쓴 기획서 내용이다. 혹시 앞으로 오디오북 지원사업에 도전할 글벗님들을 위해, 그때의 나와 같이 홀로 하얗게 밤을 지새울 당신과 당시 내가 제출했던 지원서를 나눈다. 뜨거운 응원을 담아 아무런 조건 없이.


1. 콘텐츠 소개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감성 위주의 기존 러닝 에세이 시장에서 40~50대 러너를 정조준한 자기 회복형 러닝 에세이입니다. 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직장인이 마흔여섯에 달리기를 시작해, 6개월 만에 풀코스, 2년 7개월 만에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며 삶이 달라지는 여정을 담았습니다.
처음부터 오디오북을 염두에 두고 쓰인 이 책은, 간결한 문장, 빠른 전개, 대화 중심 구성으로 청취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풀코스의 벽 앞에서 내면의 독백, 13시간 울트라마라톤 중 동반 러너와의 대화, 환자의 밥을 무심코 떠먹은 간호사의 대화처럼, 일상의 고비와 회복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감정 몰입과 공감, 도전과 치유, 연결까지,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귀로 들을 때 더 깊이 다가오는 러닝 에세이입니다.

2. 오디오북 제작 의도 및 목표
1.『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처음부터 오디오북을 염두에 두고 기획된 작품입니다. 각 에피소드 당 5~7분 내외의 짧은 호흡은 출퇴근길, 러닝 중, 산책 등 일상 속 청취 환경에 자연스럽게 맞춰졌습니다. 감정의 리듬과 대화 중심 장면은 청취 시 더 깊은 몰입을 유도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며, 에피소드마다 낭독 속도와 톤 조절이 가능하도록 내면 독백과 실제 대사 중심으로 설계되었습니다. 각 장의 말미에 배치된 ‘러너 생각’은 감정을 정리하고 청취 흐름을 안정시키는 장치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2.『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술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획하고 있습니다.
가. 러닝 경험이 있는 전문 성우를 기용하여, 장면별 감정 밀도와 인물 톤을 세밀하게 조절합니다. 예를 들어 ‘풀코스의 맛’중 아내와의 통화 장면에서는 톤 변화와 일시적 침묵으로 내면의 갈등 고조를 표현합니다.
나. 속도와 리듬 조절: 회고와 독백이 중심인 장면은 느린 호흡으로 여운을 살리고, 반복되는 자기 확언(“나는 할 수 있다”)은 빠르고 리드미컬한 낭독으로 구성해 청취 몰입을 유도합니다.
다. 현장감 있는 음향 설계: ‘고막 코치’ 장면에는 바람 소리, 신호음 등 실제 러닝 환경을 연상시키는 효과음을 삽입하고,‘거꾸로 뛰는 남자’ 장면에서는 군중 소리와 짧은 배경음으로 생동감을 더합니다.
라. 1인 오디오 드라마형 연출: 친구, 아내, 러닝 동료와의 대화는 인물별 톤 구분으로 구성하며, 에피소드 11에서는 긴 정적 뒤 손을 맞잡는 순간을 조용한 감정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톤과 속도를 섬세히 조율합니다.

3. 트리트먼트(줄거리, 본문, 내용)
“미운 내가 싫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저자는 달린 지 6개월 만에 풀코스를 완주하고, 2년 7개월 만에 100km 울트라마라톤을 넘어서며 점차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달리기를 통한 삶의 변화’라는 큰 주제를 따라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전개됩니다:

1장〈한 걸음의 힘〉: 변화의 시작
2장〈낯선 즐거움〉: 새로운 경험
3장〈울트라, 나를 만나다〉: 신체적 한계의 도전
4장〈체력 너머의 것들〉: 정신적 한계의 도전
5장〈러너의 마음〉: 치유와 위로
6장〈우연처럼, 필연처럼〉: 사람들과의 따뜻한 연결

처음에는 달리고 도전하며 자신을 찾는 개인적인 여정으로 시작되지만, 점차 자신을 넘어 타인과 연결되고 서로를 응원하게 되는 감동적인 서사로 확장됩니다. 특히 이 책은 오디오북의 장점을 살려 청취 몰입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느 챕터부터 들어도 이해에 무리가 없도록 각 장은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실제 장면과 감정을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다음으로는 각 챕터별 주요 에피소드와 본문 인용을 통해, 이 책이 오디오북 형식에 얼마나 특화되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새벽 달리기 중 오디오북을 들으며, 간호사의 한 숟가락의 밥처럼 저자 역시 지친 삶을 달리기로 버텨냈음을 돌아보는 장면입니다.


“네가, 그러니까…. 환자 밥을 먹었다고? 정말?”
“네, 저도 모르게 그만…. 밥을 떴는데 갑자기 손이 제 입으로 와서요. 한 숟가락….”
“다음부터는 아침밥을 꼭 먹고 오도록 해. 원래 배가 고플 때는 숟가락이 나를 향하지 남을 향하진 않으니까.”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 회사와 집을 묵묵히 오가며 버티던 나날. 잦은 야근과 쌓여가는 스트레스로 지쳐갔던 시간들. 마음은 텅 비어있었지만, 약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그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 간호사에게 한 숟가락의 밥이 필요했듯, 나에게는 한 번의 달리기가 절실했다."



‘풀코스의 맛’에피소드. 처음 풀코스에 도전한 저자가 35km의 벽과 폭우, 아내의 전화를 넘어서며 끝까지 자신을 믿고 완주해내는 순간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장면입니다.


“어디야? 몇 시간 전에 나갔잖아. 아직도 운동 중이야?”
숨이 차서 겨우 대답했다. “응, 계속 뛰고 있어.”
“사람이 어떻게 몇 시간을 뛰어? 그게 가능해?”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왜 내 말을 못 믿어? 오늘 처음으로 장거리 도전 중이야.”
“그걸 왜 하는데? 살 빼려고?”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제 그런 건 관심 없어. 나는 지금 한계에 도전하고 있어.”
아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대체 왜 그렇게 무리하는 건데? 이제 그만 뛰고 들어와.”
나는 지친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내가 왜 달리는지 궁금하면 나중에 말해줄게.”
41km를 지났다. 마지막 200m는 4분 4초 페이스로 전력 질주했다.
기록 4시간 20초. 생애 첫 풀코스 완주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스팔트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 승우야! 네가 해냈어! 이 힘든 걸 스스로 해냈다고!”
빗물, 눈물, 콧물이 뒤섞인 채 나는 온몸으로 외쳤다.


제출 마감날 아침이 밝았다.

2025년 3월 25일 새벽, 모든 작업을 마쳤다. 잠을 못 자서 피곤했지만, 어느 때보다 가슴은 뜨겁고 눈은 반짝였다. 표지까지 총 9장, 내 꿈이 담긴 2025년 1차 오디오북지원사업 지원서를 출판사 대표님께 톡으로 보냈다.
"대표님.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출 부탁드립니다."

한 달 뒤 사업결과 공지가 떴다. 2025년 4월 28일 오전 10시 1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게시판 글을 확인하려 마우스를 쓸어 내렸다. 접수 615권, 합격 165권. 선정작 리스트를 훑어 내려갔다. 순번 50번. 낯익은 책 이름이 그곳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하다 결과를 확인한 나는 책상 위 놓인 금빛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 메달을 움켜쥐고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질렀다. 팀원 한 명이 놀라서 자리로 달려왔다.
"팀장님! 로또 되셨어요?"


※ 참고로 2025-2차 오디오북 지원사업부터는 트리트먼트(5장 이내요약본)가 아닌 심사원고(총 원고 분량의 10%이내)로 변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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