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7일. 책 출간 D-day.
5일 전 책을 여는 첫 꼭지를 새로 썼다. 표지에 있는 러너 실루엣 선을 부드럽게 고치느라 수없이 카톡으로 대표님을 괴롭혔다. 고치고 또 고쳤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출판 강의까지 동시에 수많은 일을 해내는 출판사 대표님은 한가하게 내 책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시간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모든 대화와 작업을 카톡으로 하다 보니 답답할 때도 있었다. 카톡은 대화의 맥락과 뉘앙스 전달이 불가능했다. 뭔가를 묻거나 소통할 때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가볍게 묻는 것도 무겁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볍게 답을 한 것도 무겁게 받아들이기 쉬웠다. 전화로 하면 금세 이해될 상황도 카톡으로는 쉽지 않았다.
퇴고에 시간이 많고 여유로워서 좋았지만, 뒤로 갈수록 이러다가 혹시 책이 안 나오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누군가 이건 잘했다 이건 못했다 다시 고쳐라 하고 아픈 매를 들어줬으면 하는 갈증을 어머니와 같이 퇴고하면서 조금이라도 해소하려고 애썼다. 대표님이 너무도 바쁜 삶을 사는 줄 몰랐을 때는 오해도 있었다.
어느 날 작정하고 메시지를 남겼다.
"대표님, 혹시 상남자세요? 너무 과묵하셔서 제가 편히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최소한의 필요한 말씀만 하시는 것도 좋지만, 카톡으로 대화하다 보니 서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답답합니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제가 지금도 운전 중에 톡을 드리는 거라서요. 출판에 관심 있는 분들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강의도 하고 계속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어서 작가님과 톡을 주고받을 때 운전 중일 때가 많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저는 상황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가끔은 답답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부러움. 편집자가 원고의 내용과 방향성을 봐주고 수정 요청하면 거기에 맞춰서 다시 쓰고 퇴고한다는 작가님들은 얼마나 복에 겨운지. 부러움은 끝이 없으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첫 책을 내는 작가의 이야기를 알아봐 주고 바쁘고 힘든 상황에서 내게 손을 내밀어 출간 결심을 내주신 대표님께 고맙고 감사했다. 그분도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대표님이 출간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내가 직접 해야할 일이 또 있었다. ISBN에 등록할 책 정보, 작가 자기소개, 교보나 예스 24 온라인상 홍보문구, 들어갈 사진을 고르고 작성해서 출판사로 보냈다. 내가 마케터나 홍보 쪽 일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대충 하면 나중에 후회할 테니 잠을 줄이며 마지막까지 한 글자, 선 하나, 홍보 문구 하나하나 썼다 지웠다 하면서 새벽까지 작업을 거듭했다.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작업하고 일주일에 세 번 러닝클래스에 다니면서.
25년 3월 17일 새벽, 출판사 대표님께 톡을 드렸다.
"대표님. 늦었습니다. 최종입니다. 공식적인 책소개에 지금 자료로 전부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최종 수정한 표지와 퇴고를 마친 최종본을 넘겼다. 잠시 후 저녁 6시에 출판사에서 교보문고 링크를 받았다.
"예약판매 시작되었습니다. 28일 출고됩니다."
"네. 제 sns에서 열심히 홍보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큰 꿈을 품고 의욕적인 내가 걱정되셨는지 대표님이 한 마디 건넸다.
"작가님! 김새는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지만 친해도 생각보다 구매를 많이 해주진 않을 겁니다. 23년째 출판한 제 경험상 책 사주는 게 박합니다. 친구나 지인들에 너무 큰 기대하지 마세요. 다른 책 저자 분은 충격을 받으셨거든요. 정말로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책을 내고 나서 친구, 선후배가 싹 정리되었죠. 운동 관련 책이라 오히려 운동하시는 분들이 더 구매를 해주셨죠. 운동 의리가 더 끈끈하더군요."
"대표님. 걱정 마세요. 전 달리기를 만나지 못한 4년 전까진, 내향인의 삶에 머물렀어요. 사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없었어요. 술도 못 마시고 제 자신과 잘 지내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달리고 SNS에 글을 쓰며 조금씩 나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저를 응원해 주신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들은 러너예요. 끊임없이 나로 살기 위해 달리는 분들. SNS와 주로에서 4년 넘게 만난 소중한 인연. 오히려 달리면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분들이 생겼어요. 지금 이 순간 달리기가 필요한 분들께 더 가까이 닿고 싶어요. 4년 전 그날의 저처럼 삶이 힘든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던 분들께 닿고 싶어요. 달리기 전 저처럼 외로운 분들께 다가가고 싶어요."
매일 끊임없이 sns에서 홍보 글을 올렸다. 하루 만에 베스트셀러 딱지가 붙었다. 하루에 두 자릿수 이상 팔릴 때였다.
예약판매 첫날 43권, 둘째 날 60권, 셋째 날 16권, 넷째 날 17권, 다섯째 날 11권... 예판 5일 만에 총 147권이 나갔다.
4년 전, 달리면서 알게 된 인스타그램 친구가 있다. 바다 건너, 달리기에 진심이었던 한 일본 러너다. 우리는 만난 적 없지만, 서로의 기록에 동그라미를 남기며 응원했다.
그녀의 근성이 좋았다. 보통 달린 뒤 km당 페이스 차트를 피드에 올리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날 달린 구간 중 가장 빨리 달린 구간을 빨강 동그라미로 표시하고 그날의 자신을 칭찬했다. 그녀의 붉은 동그라미는 내게 동기부여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나도 동그라미를 그렸다. 보통은 마지막 1km가 그랬다. 항상 마지막은 전력을 다해 마무리했으니까.
그녀가 개인최고기록을 세우고 자랑스럽게 피드에 올린 날이면, 나도 번역기를 돌려가며 정성껏 댓글을 달았다. 일본어를 못해서 시간은 걸렸지만, 러너의 마음은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4년이 지났다. 그녀는 새 기록을 쓰고 나는 첫 책을 썼다. 소식이 궁금해서 모처럼 피드를 찾아갔다. 캡처한 그녀의 글을 번역기에 넣는 순간, 눈이 멈췄다.
“지고 싶지 않은 것에 이유가 있을까?”라는 글.
“어른의 마라톤은 이기거나 지는 건 아니지만 학창 시절이 생각나. 고등학생땐 모르는 여자들에게 지고 싶진 않았어. 그런 생각은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어. 모르는 여자에게 지고 싶진 않아.”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남자에게 지고 싶진 않으니까.
4년 전 초보였을 땐 작은 마음으로 뛰었다. 누군가 나를 앞질러가면 지고 싶지 않아서 그를 제치려 애썼다. 어느 날 조금 늦게 밖으로 나왔다. 달리기 좋은 날씨였다. 가볍게 달릴 생각으로 출발했다. 원천호수를 달렸다. 6분 페이스로 시작해서 조금 빨라졌다. 8km 정도 달리다가 이제 그만 뛰고 커피나 마실까 하다가 한 대 맞은 듯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지고 싶지 않은 것에 이유가 있을까?”
그 문장을 떠올린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단 한 명에게만큼은 정말 지고 싶지 않았다. 바로 ‘익숙한 나’에겐.
대충 달리고 끝내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10km를 끝까지 채우기로 했다. 마지막 1km가 남았을 때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아.”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아!”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아!!!”
중얼거리며 뛰었다. 페이스는 4분대로 접어들고 마지막엔 3분 41초 페이스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해냈다!”
나는 ‘익숙한 나’에겐 지고 싶지 않다.
‘너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익숙한 목소리들.
달리기란 ‘익숙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기술’이 아닐까. 쉽게 포기하고 자신을 쉽게 여기고
안주하려는 ‘익숙한 나’를 이기는 기술.
내 책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를 검색했다. 제목 옆에 낯선 ‘베스트셀러’가 쓰여있었다. 예약판매 6일 차. 예스 24 한국에세이 38위, 교보 85위. 많은 분들이 나오지도 않는 책을 응원해주시고 계셨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때 하루하루 실시간으로 감동받았다.
아직도 가끔 내 안의 익숙한 나를 본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한 나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
모르는 여자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뛰는 그녀처럼. 지고 싶지 않은 이유는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베스트셀러 빨간딱지와 더불어 벅찬 마음으로 교보문고에서 올라가는 책 순위를 보고 있을 때, 출판사에서 톡이 도착했다.
"작가님, 오디오북 지원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