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를 골라줘

by 러너인

조회수 9,809명, 댓글 435개.

내 책표지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스레드를 빼놓을 수 없다. 9개월 넘게 스레드를 해오면서 최단기에 가장 뜨거운 조회수와 더불어 댓글이 폭발했던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먼저 고백해야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출간된 내 책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 표지에 꼭 담고 싶었던 사진이 있었다.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인 Ben Garvin이 찍은 보스턴 마라톤 완주자들 사진.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직도 나는 희망한다. 달리기에 관한 새로운 책을 낸다면 꼭 그분의 사진을 내 책표지로 싣겠다고.


초고를 쓰던 어느 날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보스턴 마라톤 선수들의 기쁨과 고통이 담긴 놀라운 사진과 만났다. 코로나로 취소된 보스턴 마라톤이 2년 만에 다시 열렸다. 125년 전통의 마라톤이 가을에 개최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날을 위해 Ben은 보스턴으로 날아갔다. 마라톤 완주자들의 감동적인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한다. “피니시 라인은 진정으로 비범한 것을 성취하는 비범한 인간의 논스톱 시각적 폭포수다. 나는 스스로에게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승리나 고통, 순수한 기쁨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찍는다.”


보스턴 마라톤 완주자들의 흑백사진을 보다가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에 휩싸였다. 인간이 그릴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표정과 무늬가 한 장의 사진에 담겨있었다. 평생 처음 눈을 떠 일출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경이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이 든 러너, 가족을 부둥켜안고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키스와 포옹을 나누는 두 사람, 바닥에 엎드려 피니시라인에 입을 맞추는 러너,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든 남자, 완주한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안고 오열하는 여자.


사진에는 어떠한 설명도 없었지만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그 사진은 러너의 가슴으로 보고 읽어야 하는 사진이었다. 내가 책에서 쓰려는 경험과 이야기, 중년의 내가 번아웃을 넘어 달리면서 느낀 환희와 감동이 바로 그 사진 한 장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담긴 사진들을 모아서 책 표지로 삼고 싶었다. 처음엔 꿈만 꾸었다. 하지만 나는 러너였다. 높은 언덕도 뛰어오르는 용기있는.


시도도 안 하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글링으로 Ben garvin의 웹사이트를 찾았다. 사이트 한쪽에 비즈니스를 제안하는 메뉴가 있었다. 영어를 손에 놓은 지 오래였다. 파파고 앱을 돌려서 제안서를 썼다. 시간이 지나 정확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존경하는 벤 가빈 선생님. 저는 대한민국에 있는 40대 중년 러너입니다. 번아웃된 마흔여섯에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4년간 달리며 느낀 점과 경험을 담아 얼마 후 첫 달리기 책을 내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찍은 보스턴 마라톤 완주자 사진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떨리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났습니다. 그 사진 속의 그 남자는 제 자신처럼 느껴졌거든요. 다른 어떤 그림, 사진도 선생님께서 찍으신 그 피니시 사진 속 얼굴 표정보다 더 제 책과 어울릴 수 없어서 펜을 들었습니다. 용기 내어 부탁드립니다. 제 첫 책표지에 선생님 사진을 꼭 싣고 싶습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장이 없었다. 퇴고와 출간일정에 쫓겨 그 꿈은 당분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분께 다시 부탁드리고 싶다. 작가로서 러너로서 소원이라고. 그러려면 또 달리기 책을 계속 내야겠지만. 내 책 표지를 사진의 거장 Ben garvin 작가님 사진으로 채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다했다. 아쉬움은 없었다.

결국 출판사에 책 시안을 부탁드렸다. 첫 번째 시안은 민트색 배경에 선으로 그린 러너가 정면을 향해 달려오는 일러스트였다. 나쁘진 않았지만 다른 시안과 비교하고 싶었다. 두 번째 시안은 아주 높은 빌딩 위에서 누군가 앉아있는, 몸은 보이지 않고 운동화 신은 두 발만 내밀고 있고 하얗고 커다란 구름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마지막 시안은 운동장 트랙 한가운데 동그란 곳에 파란색 운동화가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 신발끈 모양이 LOVE를 나타내는 시안이었다.


책을 쓰면서 친해진 작가님이 팁을 주었다. "승우님, 책표지 투표는 반드시 하세요. 솔직히 책표지는 작가님과 출판사가 미리 정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책표지 투표는 예고편과 같아요. 내 책이 곧 나온다는 걸 세상에 알리는 거죠."

출판사에선 특별한 말씀이 없었지만, 작가님 추천처럼 sns에서 책표지 이벤트를 해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책표지 투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달리기 책이었다. 내 책이 곧 나오는데 비슷한 시기에 달리기 책이라니... 젊은 여성 러너작가였고 책 표지도 깔끔했다.


다른 달리기 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내 책이 잘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괜스레 마음이 어두워졌다. 씁쓸한 마음에 창을 닫았지만 자꾸 그분의 책이 눈에 어른거렸다. 부끄러웠다. 나이 50이나 된 어른이 일찍부터 러너가 되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분의 첫 책을 격려하고 응원은 못할망정 작고 옹졸한 마음이라니.


웃음이 났다. 나는 뒤늦게 달리고 쓰면서 이제야 러너가 되고 첫 책을 내는데, 그분은 이른 나이에 달리면서 책까지 쓴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처음엔 그녀가 어떻게 책표지 투표와 이벤트를 하는지 참고하려고 본 피드였지만, 어느새 그녀를 응원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표지를 고르거나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적었다. 마치 나의 책표지 이벤트처럼 안쓰러웠다.

경쟁작(?)인 그녀의 책표지 이벤트 글과 사진을 내 인스타에 리그램 했다. 곧 출시될 내 책 홍보를 해도 부족한 판국에 내 sns에 다른 분 달리기 책 홍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분이 dm으로 감사를 표했다. 놀라고 감동한 것 같았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는 달리기를 주제로 한 책 작가가 자신의 피드에 남의 책 표지 투표 이벤트를 홍보하다니... 그도 나도 따뜻해졌다. 하지만 내겐 또 다른 숙제가 있었다. 세 개의 책표지 시안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스레드가 떠올랐다. 언젠가 본 누군가의 표지 이벤트가 떠올랐다. 반말이 익숙한 스레드에 신기해할 때 만난 글이다.

"표지를 골라 줘!" 이 마법의 여섯 글자를 쓴 누군가의 스레드가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1줄짜리 스레드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다. 언젠가 내 책이 나오면 나도 그처럼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스레드앱을 켜고 주제에 '책표지투표'라고 적고 본문은 이렇게 적었다. "표지를 골라 줘! (나도 책 낼 때 이거 너무 하고 싶었어) 러너 에세이야! 출간은 3월 31일! 부탁해!"

이렇게 성의 없이 짧은 글에 누가 반응이나 할까 싶었는데 스레드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조회수가 계속 올라가고 댓글이 쌓이기 시작했다. 거의 하루 반나절 이상 계속 알람이 울려서 정신없이 답글을 달다가 나중에는 포기했다.


조회 수 9,809명, 댓글 수 435개. 현직 책 디자이너의 전문적인 평가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댓글에 빼곡히 담겼다. 표지이벤트 글로 이렇게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아서 감사하고 신기했다. 러너를 선으로 그린 첫 번째 시안이 그중 가장 나은 것 같다는 생각에서 1번으로 마음을 정했는데, 사람들은 운동화 끈으로 LOVE를 그린 3번 시안에 많은 표를 던졌다.


하지만 나는 최종 민트색 표지의 1번을 책 표지로 정했다. 이 표지를 고른 이유가 있었다. 앞에서 내가 살짝 이야기한 남몰래 간직한 꿈을 기억하는가? 출간을 앞둔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출판사 투고 전날밤 안갯속에 서 있던 내가 자신에게 약속했던 꿈이야기.


그때 나는 내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상상을 했다. 아직 투고조차 안 한 주제에 말이 되냐고, 누가 네가 쓴 책을 보겠냐고 작은 마음은 계속 떠들어댔다. 현실성이 없다고 비웃는 그에게 직접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로 했다. 방을 둘러보다가 표지에 여백이 있는 민트색 책 한 권(좋은 생각 30주년 기념 에세이책)을 발견했다. 당시 생각했던 책 제목(가제)과 필명을 매직펜으로 책 여백에 크게 쓰고 눈을 감았다.


그 기억을 잠시 잊고 있었다. 1년이 지나 출간을 앞두고 표지를 정하느라 고민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많은 표를 받은 3번 운동화와 원래 생각했던 1번 민트색 러너 시안 중 고민이 커졌다. 1번이냐 3번이냐 고심하며 방 안을 둘러보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민트. 좋은 생각. 모든 달리기, 러닝화.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바로 너였구나."


1년 전, 내가 쓴 책이라고 믿으며 제목을 썼던 가짜책. 그날의 나처럼 나는 민트를 선택하기로 했다. 표지를 정하고나니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출간 카운드다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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