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지금 시간 잠깐 되세요? 잠시 드릴 말이 있어서..."
"네. 말씀하세요."
"죄송한데 회의실에서 말씀드리려도 될까요?"
"무슨 문제 있어요? 예산 쪽에?
"아니네요. 제 개인적인 일로 좀 여쭈려고요."
"아... 네. 지금 갈게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가 일하는 사무실로 가서 말을 걸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내가 묻자 그는 회사일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물었다가 개인적인 일이라니 안심한 표정이었다.
문제가 있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달리기를 시작하게 된 건 그가 기여한 역할이 컸다. 병 주고 약도 준 사람이니까. 그와의 이야기를 내 책 첫 번째 꼭지에 넣었다.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였고 사람들이 회사에서 겪을 수 있는 평범한 갈등 구조라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첫 글은 중요했다. 그와 함께 일하며 좋은 시간도 많았지만, 내가 번아웃이 왔을 때 내게 고통을 안긴 사람도 그였다. 그 때문에 번아웃이 온 건 아니었지만 그 아픔을 더 깊어지게 하고 회사에 출근하는 걸 두렵게 만든 사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회사생활까지 힘들어야 하나 출근길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안 좋지는 않았다. 가깝게 일하기 전에는 오히려 잘 지내고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관계가 악화되었다.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하게 되는 걸 비난하거나 사사건건 나를 못마땅했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어쨌든 결국 그 덕분에 만보 걷기를 시작하고 그 길로 러너까지 되었으니 그는 내게 은인이라 지금은 감사한 마음뿐이다.
회의실에서 그에게 말했다.
"제가 책을 쓰고 있거든요. 이제 다 썼고 출판사에서 다음 주면 인쇄에 들어가요."
"와, 정말요? 대단하세요. 그런데요?"
"사실 제가 과장님과 같이 일할 때 많이 힘들었거든요. 그때 에피소드를 책의 첫 이야기로 가볍게 적었어요. 물론 이름을 쓰거나 하진 않았는데, 계속 그게 제 마음에 걸려서요. 물론 에피소드 끝에는 서로를 응원하며 훈훈하게 마무리되지만, 시작은 서로의 갈등이 심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혹시라도 기분 나쁘시지 않을까 해서요."
"아. 제 이야기도 책에 나와요? 어떻게 쓰셨을까 궁금하네요."
"네. 여기 원고 있으니 가져가서 보시고 말씀 주세요. 지금 출간 직전이라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네. 가져가서 보고 금방 말씀드릴게요."
다행히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멀어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가 혹시라도 싫다고 하면 어쩌나 하고 혼자 안절부절못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책이 나오고 나서 혹시라도 그가 알게 되어 달려와서 왜 내 이야기를 마음대로 써서 넣었냐고 하면 그때가 더 문제니까.
1시간쯤 지났을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승우님. 저 원고 다 읽었어요. 재미있게 잘 쓰셨네요. 근데 제가 그때 그 정도였어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너무 과장되게 쓰신 게 아니에요? 그때 사실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승우님도 아실 테니, 그런 이야기도 같이 써주세요. 누가 보면 일도 안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한 줄 알 테니. 그것만 넣으면 저는 괜찮아요. 책 잘되시길 빌게요."
"네.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수정해서 문자로 보낼게요."
그의 말대로 내용을 한 줄 추가해서 보냈다. 그가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 역시 정면돌파가 답이구나. 1년 간 책을 쓰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혹시라도 그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를 아는 분들에게 잘못된 선입관을 줄까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책의 첫 에피소드로 굳어져 있어서 그 에피소드를 다른 방식으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부분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내게 남아 있었다.
그를 찾아가서 책에 그 이야기를 넣어도 되는지 물을 용기가 없었다. 그가 만일 싫다고 거절하면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대안도 없었으니까. 그냥 좋게 생각하자고 잘될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다가 결국 출간 직전까지 와버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용기를 냈고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다. 마음에 한 점의 걱정까지 오늘 그와의 대화와 원고 수정으로 이끈 내게 기분이 좋았다. 즐겁게 퇴근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집을 나와서 출근버스를 탔다.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이 시간에 무슨 문자지?
"승우님, 죄송한데 어제 말한 거 취소할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 정도까지 못되게 하진 않은 것 같아요.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걸 보면 제가 굉장히 나쁜 사람처럼 오해할 것 같아요. 제 이야기 책에 절대 넣지 말아 주세요. 미안하지만 다 빼주세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절망적인 내용이었다. 정신이 나가서 다음 정거장에 무작정 하차했다. 버스정류장에 죄인처럼 고개를 감싸고 한참 동안 있었다. 일단 출판사 대표님께 SOS를 보냈다.
"대표님, 저 승우입니다.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요? 작가님"
"제가 쓴 첫 에피소드에 나오는 분께 혹시 이야기를 써도 괜찮냐고 여쭸는데 오늘 갑자기 쓰지 말라고 하셔서요. 인쇄가 코앞인데 혹시 지금 벌써 인쇄가 들어간 게 아닌지요. 걱정돼서 바로 전화드렸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일단 작업 홀딩하고 하루만 기다릴게요. 오늘 다시 써서 주시면 되니까요. 작가님, 이런저런 일이 항상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원고 새로 써서 주세요. 대신에 너무 늦지 않게 오늘 저녁까지는 주셔야 해요."
"예. 대표님.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서장님께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 연차를 쓰겠다고 전화드리고 연차를 올렸다. 출간 직전 이게 무슨 일일까. 이제 어쩌지? 1년 간 쓰고 퇴고까지 끝낸 첫 글을 이제 와서 어떻게 하루 만에 새로 쓴단 말인가. 한숨을 쉬다가 일단 근처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한참을 앉아있어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린 순 없었다.
누군가를 꼭 넣을 필요가 있을까? 사실 누군가에게 운동을 시작할 계기를 발견한 건 맞지만, 그 발견한 주체는 나였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꼬박 앉아서 그날 그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원래 썼던 장면에서 그를 지웠다.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가서 나를 관찰하며 그 장면을 재구성했다. 특정한 한 사람이 계기가 아니라 그 당시 상황과 주어진 모든 벽이 내가 운동을 시작하고 달리기한 계기였다. 그 사람이 내 책의 주인공이 아닌 내가 주인공이었다. 나는 꼬박 밥을 굶고 쓰고 지우며 밤 10시에 수정원고를 마쳤다. 12시간 정도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듯 진땀을 흘렸다.
대표님께 메일을 보내고 문자를 드렸다. 휘청거리며 스터디카페에서 나왔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 흘렀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어떻게 시작한 책이고 원고인데. 이 정도는 위기도 아니고 문제도 아니라고. 이까진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를 믿고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그날 밤에 비하면, 이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고. 나를 다시 나를 꼭 안아주었다.
긴급 수정 전 내 책 첫 글 오리지널 버전을 여기 처음으로 공개한다.
“인사 발령 명단을 보는 순간,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였다. 오랜 경력과 친분이 있는 그가 우리 팀에 들어온다면, 내게 큰 힘이 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첫마디는 예상 밖이었다. 자리를 정리하자마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선언하듯 말했다. 왜 제가 이 부서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세 가지만 요청드립니다. 첫째, 야근은 못합니다. 둘째, 연차는 다 쓰겠습니다. 셋째, 문서는 안 꾸밉니다. 내용만 맞으면 충분하니까요.”
말문이 막혔다. 먼저 입사한 그가 첫날부터 ‘팀워크 삼 계명’을 선언할 줄은 몰랐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순간 팀장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스쳤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열심히 일하겠다던 기대는 단번에 무너졌다. 직장에서 수없이 힘든 일을 겪어왔지만, 이번엔 달랐다.
"노련하다고 믿었지만, 인간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구나'
부서장의 기대와 ‘팀워크 삼 계명’을 외치는 팀원 사이에서 나는 점점 압박감을 느꼈다. 숨 돌릴 틈 없이 새로운 일이 쏟아졌고, 의견 충돌은 갈수록 잦아졌다. 오랜 친분마저 낯설게 느껴질 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지금 팀장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걸까?’
코로나로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그는 방역 수칙에 더욱 예민해졌다. 마스크를 코 위까지 제대로 쓰지 않으면 정색하며 지적했고, 업무 중 잠시라도 가벼운 이야기가 나오면, '쓸데없는 수다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라며 말을 끊었다.
서로의 벽을 넘을 방법이 필요했다.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차가운 반응에 부딪혔지만, 그의 일상에서 작은 틈을 발견했다. 그것은 산책이었다. 그는 매일 점심을 서둘러 먹고 정해진 시간에 빠르게 걸었다. 점심시간을 활용한 산책은 마치 자신과의 약속처럼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매일 꾸준히 운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가다가, 운동복 차림으로 나가는 그와 마주쳤다. ‘정말 점심 운동이 그렇게 좋은 걸까?’ 호기심에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산책 가실 때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요즘 살이 쪄서 걸어보려고요.”
그는 놀란 듯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좋아요. 그럼 5분 뒤 정문에서 봬요.”라고 대답하고는 먼저 밖으로 나갔다.
회사 근처에는 약 5km 정도의 둘레길이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가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힘들었지만, 사무실에서 잠깐 쉬는 것보다 훨씬 상쾌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점심 식사 후 함께 산책을 나섰다. 앞뒤로 걷는 시간이 쌓이면서 서먹했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어느 날 새로운 길을 찾으려다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오후 1시까지 회사로 돌아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저만큼 앞서 걷던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우리 지금 뛰어야 해요! 이렇게 걸으면 제시간에 도착 못 해요. 저 먼저 뛰어갈게요!”
‘뭐라고?’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며 오기가 생겼다. ‘나 혼자 늦을 순 없지.’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1km를 허겁지겁 뛰고 나니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가까스로 오후 1시 직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얼굴과 목덜미에서 땀이 줄줄 흘렀고, 찬물로 세수를 해도 온몸이 후끈거렸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자리에 앉아 땀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걷기도 힘든데, 달리기라니! 이런 무리한 산책은 그만둬야겠다.’
퇴근길에 낮의 달리기가 떠올랐다. 숨이 찰수록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는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으로 혼자 호수공원에 갔다. 정장 차림으로 5km를 뛰다 힘들면 걷고, 다시 달렸다."
그날부터 나는 혼자서도 달리기를 이어갔다. 처음엔 규칙적인 산책이 낯설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꾸준함이 달리는 습관을 선물했다.
바꾸기 전 위의 글로 시작했으면 내 책도 스테디셀러가 되었을까? 가보지 않은 길이라 모르겠다. 하지만 내 책으로 누군가 상처를 받은 덤으로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출간 직전 용기 내어 그에게 내 책 원고를 건네고 그대로 책에 담아도 되는 지를 묻던 그날의 용기가 나의 베스트셀러임을 믿는다.
글에는 힘이 있다. 작가이기 이전에 우리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군가를 후킹 하는 글을 쓸 때, 그 글 안에 내가 아닌 누군가를 쓸 때, 그 역시 사랑받기 원하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게 글을 쓰는 작가의 자세이고 의무라고 믿는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이제는 진짜 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