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접으려고 했습니다

by 러너인

비상계엄 다음날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현재 여의도가 어수선해서 출간시기를 2월 말이나 3월 초로 하면 어떨까 하는데 의견이 어떠신지요?"
새해에 새로운 결심을 하는 분들도 많아서 1월 출간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와서 너무 미뤄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비상계엄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의견을 전했다.
"가능하면 1월 출간을 목표로 진행하되, 정 상황이 어렵다면 연기를 검토하시는 건 어떠실지 합니다. 저도 책이 잘 되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니 대표님과 목표는 같습니다. 고민이 되네요."
"계엄령 성공했으면 출판사 접으려 했습니다. 일단 구정 전으로 잡고 시기를 보는 것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대표님이 전문가시고, 판단이 정확하시니 무리하시지 마시고 저와 편히 논의하시면서 유연하게 가시지요."
이러다가 책이 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비상계엄 상황이 언제쯤 정리될지... 출간이 미뤄져서 불안해졌다.

희망적인 주제로 방향을 돌렸다. 오디오북이었다.
"대표님. 제가 쓴 책 구조, 리듬, 내용 상 오디오 북으로 나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작비가 많이 들더군요. 찾아보다가 제작비를 500만 원까지 지원해 주는 '오디오북 지원 프로젝트'가 있어서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어떠신지요?"
"네. 출간되면 전자책과 오디오북 지원하겠습니다. 오디오북은 경쟁률이 심해서요. 저희도 매년 신청은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좋은 소식이 없네요."
"대표님, 이번 저희 책 나름 경쟁력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술술 읽히고 재미가 있거든요. 제가 제 책 원고 퇴고하면서 기계음으로 읽어주는 낭독 어플로 들어봤는데 괜찮았어요. 운동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니 한 번 지원해 볼 만할 것 같아요."
"네. 되기만 하면야 좋겠죠."

오디오북지원사업 선정이 로또 당첨 같은 느낌으로 들려서 암울해졌다. 내 책이 오디오북까지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 보았다. 달리면서 새벽에 듣던 오디오북, 뮤지션 요조 님 낭독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간호사, 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낭독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벅차고 웃음이 났다. 꿈같은 이야기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얼마 후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는 뉴스가 들렸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책도 세상에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단 앞으로 두세 달이면 출간이니 미리 책을 알릴 루트가 필요했다. 인스타그램을 주력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금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건 스레드였다. 한참 전에 자동으로 가입은 되어있지만 한 번 들어가 보니 '스하리' '스팔 해요' 같이 욕설처럼 들리는 맞팔 강요 등 내용도 없이 경쟁적으로 몸집만 불리려는 글들이 자주 보였다. 몇 번 인스타그램 글을 복사해서 붙여 넣다가 곧 스레드를 나와버렸다.

스레드에 다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막상 진지하게 살펴보니 좋은 글들이 많았다. 처음에 폭주족들이 휩쓸고 간 곳에 예쁜 꽃이 자라고 있는 느낌이었다. 스레드가 반말로 아무 생각 없이 서로를 팔로우하는 곳이라는 편견이 깨졌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매번 SNS에 반말로 써본 적이 없어서 낯설었다. 회사에서 팀원들이 제발 말 좀 놓으라고 해도 존대가 편한 팀장처럼 어색해서 반말로 글을 썼다 지웠다 하며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을 때 누군가 쓴 스레드 글을 만났다.
"진지한 스레더에게. 너무 고심하지 말고 스레드를 써도 돼. 블로그 쓰듯이 찬찬히 생각하고 열심히 써도 그 글이 알고리즘을 타지 않으면 어느 순간 아무에게도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
아차 싶은 글을 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블로그처럼 검색해서 다시 읽는 사람도 극소수일 거고… 무엇보다 알고리즘은 얼마 지난 글들은 추천해주지도 않더라고. 한순간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우리 삶의 실수나 걱정, 고민처럼 다 한 때 유효한 거야.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무엇보다 내가 혼자서 궁금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게 전혀 다르다는 걸 눈으로 보는 게 큰 배움이야.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 그러니까 자꾸 나와서 만나야 한다는 것! 그걸 알면 나에게도 더 큰 자유를 주고 새롭게 세상을 보게 하는 것 같아. 생각이 많고 진지한 나에게도 해주는 말이야. 가볍게 생각하고 가볍게 쓰자."

2025년 1월 29일, 스레드를 다시 시작했다. 무슨 글부터 써야 할지 몰라서 당시 유행하던 스하리 1,000명 프로젝트로 시작했다.
"안녕? 용기 내서 쓰는 첫 반말 글이야. 난 지금 떨려. 높임말로 쓰다가 어느 스레더의 용기 글에 처음으로 반말 댓글을 남겼어. 누군가 글로 꼭 안아주는 것 같아서 고맙고 힘이 났어. 난 인티제이고 러너인 정승우야. 인스타그램에서 러닝을 주제로 치유와 용기 주는 글을 쓰고 있어.
가끔은 나도 누군가의 글로 용기를 얻고 싶어.

나처럼 내게 글을 써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나처럼 글로 용기를 주는 누군가 딱 한 명만 있기를 바래. 오늘 그런 위로를 받은 김에 처음으로 반말 스레드를 쓸 용기를 냈어. 난 2025년 3월에 달리기 에세이 첫 책을 출간해. 새해엔 우리 조금 더 용기 내자. 나도 힘낼게."

지금이라면 스하리 프로젝트를 안 했겠지만, 그땐 초보라서 스레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스하리, 반하리를 인사처럼 해야 하는 줄 알았다. 편하게 글을 올리던 어느 날, 책 프롤로그에 쓰고 싶었던 평소 생각했던 달리기에 대한 생각을 가감없이 스레드에 적었다.

"나는 4년간 달리면서 세상과 눈 맞추는 법을 배웠어. 세상 앞에 나를 드러내고, 당당히 시선을 마주하는 용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내향성도 단점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위대함이 된다는 것도.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최고라고 믿는 세상에서, '빠르게'가 아닌 ‘바르게’ 달리는 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방향임을. 혼자 달릴 용기와 함께 달리는 즐거움,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신감도 얻었어.


새벽잠이 많아도, 고통이 더 크다면 이불을 박차고 눈물 흘리며 달릴 수 있다는 것. 한계에 도전하는 러너들의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고통과 사랑이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지.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내가 아니라, 고통과 마주하며 달릴 수 있는 용기 있는 나로 바뀌었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세상에 드러낼 때, 삶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빨리 달리더라도, 자신을 진정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성취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배웠어."

놀라운 일이 생겼다. 조회수 4,736회, 댓글 135개, 리포스트 40번. 처음 받는 관심과 뜨거운 반응에 얼얼했다. 알고리즘 신이 점지한 듯 미친 듯이 조회수가 올라가고 댓글이 쏟아졌다.

그날 스레드의 폭발적인 가능성을 보았다.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와 달리 스레드는 돋보기처럼 어떤 주제가 터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었다.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트래픽이 있었다.


또 하나 알게 된 건 그 관심이 모두 팔로우나 꾸준하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도로에 수많은 차가 지나가듯 어느 순간에 한쪽으로 트래픽이 몰려서 주차장처럼 차가 몰리고, 어느 순간에 다시 제갈길을 가서 한적해진 텅 빈 고속도로처럼 이곳 스레드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책 출간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으니 꾸준히 해보기로 했다. 조금씩 스레드에 글을 올리며 출간과 관련한 글을 썼다. 퇴고와 작가소개까지 마쳤다.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있었다. 책 표지였다.

keyword
이전 17화AI가 내 글을 안아줄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