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호기심에 수원 컨벤션센터로 달려갔다. AI로 쉽고 빠르게 블로그 글을 쓴다고? 강의가 시작되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프롬프트에 질문을 입력하니 AI가 알아서 척척 답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강사가 화면에 띄운 건 요리법이 가득한 블로그였다. 이웃도 많았다. 강사님 취미가 요리인가? 갸우뚱하는 우리에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요리를 전혀 못해요. 이 블로그는 전부 GPT로 만들었어요. 글도 사진도 다요. 요리를 못해도 전문가처럼 글을 쓰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충격이었다. 챗GPT에 페르소나를 입히고 질문만 던지면 척척 답을 내놓는다니, 완전히 램프의 지니 아닌가? 퇴고 중이던 내 초고가 떠올랐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했다. 이렇게 똑똑한 AI를 활용하면 얼마나 글이 좋아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가자마자 퇴고에 써보기로 했다.
책 초고 한 꼭지를 붙여 넣고 주문을 넣었다.
“gpt야. 지금 너는 대한민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야. 지금 붙이는 글은 달리기를 소재로 번아웃을 극복한 한 남자의 책 초고야. 다시 써줘.”
AI가 그럴듯하게 고친 글을 내놓았다. 문득 생각했다. 대한민국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 더 큰 꿈을 꾸기로 했다.
“이번엔 세계적인 에세이 작가 기준으로 써봐.”
결과는? 아까보다 별로였다.
일단 책 제목부터 다시 써보기로 했다. 새로운 주문을 외웠다. “gpt야. 100만 부 이상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책 제목을 추천해 봐.” gpt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100만 부 이상의 판매를 목표로 하는 제목과 부제목은 독자의 관심을 강렬히 끌고, 강력한 감동과 공감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그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수정한 제안입니다. 책 제목은 '한 번은 달려봐라', 부제목은 '내향인의 인생을 바꾼 가장 작은 도전'입니다.”
“gpt야. 지금 제목을 추천한 이유와 근거를 말해봐.”
“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강렬한 메시지: 제목은 도전적인 시도를 유도하며, 부제목은 인생을 바꾸는 도전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독자들에게 강한 흥미와 기대감을 줍니다.
2. 구체적 목표: '100km 도전'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언급하면서도, 인생의 변화라는 요소를 강조하여 성취감과 희망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3. 광범위한 공감대: 내향인의 경험을 통해 자기 변화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넓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중년층과 내향적 성향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변화를 원하는 다양한 독자층에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4. 문구의 강렬함: ‘인생을 바꾼’이라는 표현이 감동을 줍니다. 이는 독자들이 책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5. 예상 독자는 ‘중년층: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고려 중인 40대~50대’, ‘내향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회적 관계 회복과 개인적 도전이 필요한 독자’, 자기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 달리기를 통한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폭넓은 독자층입니다.
6. 예상 판매부수는 강렬한 제목과 감동적인 부제목으로, 100만 부 이상의 판매가 가능한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책의 입소문, 미디어 노출, 강력한 마케팅이 동반된다면 높은 판매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
중독되듯 나는 계속 gpt와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맞춤법 이상한 곳이 없는지 묻는 소극적인 질문에서 점점 “이 글을 출간 후 100만 부짜리 베스트셀러로 바꿔 줘.”라는 자극적인 질문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쓴 초고를 꼭지별로 일일이 복사해서 붙여 넣고 AI 신의 계시를 기다렸다. 무료버전이라 그런지 감질맛이 났다. 어쩔 때는 기가 막히게 좋은 대답을 내놓다가 어느 순간에는 완전히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답변에 의구심이 생겼다. 그래도 계속 꾸며서 대답하는 간사한 gpt의 아부에 휘둘려서 새벽까지 대화를 멈추지 못했다.
무료버전이라 제한이 있었다. 질문이 길어지면 쿨다운 시간이 필요했다. 질문 몇 개를 던지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다가 제한이 풀리면 또 다른 원고를 집어넣었다. 챗gpt 중독인가? gpt 유료 버전은 똑똑한 지니를 마음껏 불러다가 일을 시킬 수 있지만, 무료는 지니를 부를 수 있는 횟수가 제한되어 있고, 그마저도 한 번 부르면 한참 기다렸다가 다시 부를 수 있었다. 새벽에 전체 원고를 조금씩 붙여 넣으며 퇴고를 하다가 결국 유료버전을 구입했다. 초고를 100만 부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gpt인데 그까짓 몇 만 원이 아까울까?
광란의 gpt 퇴고의 밤이 지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gpt가 퇴고한 원고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시작했지만 인위적이라 글맛이 없었다. 매끄럽지만 이상했다. 진짜 사람과 아주 닮아있지만 부자연스러운 인조인간 같았다.
AI는 결국 도구였다. 제목을 정하고, 목차를 정리하는 데까지는 유용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건,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건 결국 내 몫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과 질문 수준에 맞게 그럴듯한 답을 지어낸다는 걸 배웠다. 내가 똑똑하게 AI를 활용하지 않으면 AI를 제대로 쓸 수 없다는 것과 전체 원고를 넣고 그냥 누구처럼 바꿔달라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초고 수정에 AI 힘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 아니 밤새 힘을 빌려서 테스트해 본 결과 쓸만한 결과가 없었다. 조금은 투박해도 내가 직접 쓰고 고친 퇴고가 gpt가 써준 100만 부를 팔 퇴고버전보다 나았다. 새롭게 배운 기술이 아깝고 금방 구독한 유료버전도 활용이 필요했다. 여러 번 테스트해보니 책 제목 추천도 별로였다. 며칠을 테스트해도 이상한 조합의 제목만 추천해서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책 제목도 내가 직접 짓기로 했다.
책은 제목이 중요하다. 맨 처음 출간계약서에 썼던 책 제목은 “마흔여섯 직장인, 회사보다 먼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였다. 쫓겨났다는 말은 은유였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서점에 가보고 빈 종이에 여러 가지 제목을 써보기도 했다.
이런 제목들이 후보였다. “달리기에 이름을 지어주는 남자”, “나는 달리기가 있는 삶을 꿈꾼다”, “달리기로 팔자 고치는 법”, “달릴 수밖에 없는 너에게”, “달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달리지 못할 만큼 죽어있는 인생은 없다”, “달리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 “달리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 “달리지 않으면 어쩌면 알 수 없는 것들”, “달리지 않으면 아마도 알 수 없는 것들”, “한 번만 달려봐라”, “내향인의 달리기”, “남자에게 달리기가 필요할 때”, “새벽을 달리는 고슴도치”...
딱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제목에 무조건 “달리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리기라는 단어가 “러닝”보다 촌스럽고 특정 그룹만 관심을 보일 수 있어도 내 책이 “달리기”를 통해 번아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내용이니 본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몇 날 며칠 출퇴근길에 지나치는 간판을 유심히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시 퇴고하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달리다가 처음 러닝화를 신고 달린 경험을 담은 “러닝화의 생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듯한 발구름, 통통 튀는 신기한 느낌.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며 러닝화 라벨에 처음 신은 날짜를 적은 그날 이야기를 쓰다가 끝맺음을 위해 검색창을 열였다. 한 때 유행하던 만화의 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때 되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날따라 유난히 이 장면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러닝화 버전도 있었다. “러너가 죽으면 먼저 가있던 러닝화가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 이야기를 러닝화 에피소드에 넣기로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라는 대목이 자꾸 생각났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 달리기 이야기. ‘그래!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잖아. 지금 책에 쓰고 있는 내 달리기에 이야기가 있듯 너의 달리기에도, 지금 달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자기만의 달리는 이유가, 꺼내지 못한 숨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나의 달리기 이야기를 통해 모든 러너들이 자신의 첫 달리기 이야기를 떠올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속도와 거리와 상관없이 모두의 달리기에는 소중한 이야기가 있음을 기억하려는 마음으로 책 제목을 정했다.
“모든 달리기에는 이야기가 있다.”라고.
AI가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다. 가장 유용했던 것은 목차였다. 목차를 감각적으로 짓기에는 좋았다. 처음에 구상했던 목차들보다 챗gpt 제안한 목차들이 나은 게 많았다. AI로 초고를 쓰거나 완전히 고치는 것은 부적합하고, 다 쓴 초고를 단어 수준에서 더 나은 표현을 찾아보거나 목차 구성에는 도움이 된다는 걸 배웠다.
이제 책 제목, 목차도 완성되고 6개월의 퇴고 대장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며칠 후 퇴고를 끝마친 원고를 곧 출판사로 보내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뉴스에 대통령 긴급 담화가 떴다. <비상계엄 선포> 계엄사령부 ”모든 언론·출판 통제“. 이걸 어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