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냐 사인이냐

by 러너인

"작가님, 사인 연습하고 계시죠?"
하하. 서명이라니. 책을 쓰면서 처음엔 생각조차 못했다. 퇴고하느라 바쁠 때. 누군가 SNS에 댓글을 달았다. “사인 연습하고 계시죠?”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사인? 책을 내려면 사인도 연습해야 했다. 평소 영문 jung을 흘려 쓰던 서명은 누군가의 마음에 감사함을 쓰기에는 예쁘지 않았다. 책을 구입해 주신 고마운 분들께 감사를 담을 수 있는 멋들어진 사인 하나 어디 없을까? 출간이 다가오자 압박감이 커졌다.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날, 검색창을 열었다. 몇 만 원을 써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눈에 띈 서명 작가님에게 사인 제작을 부탁했다. 특이사항에 한글 서명을 원하고 곧 출간할 러너 에세이 서명 용도라고 썼다. 마침 사인 작가님도 러너라서 반가웠다. 며칠 뒤 시안이 도착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러너의 모습으로 ‘정’을, 이름 ‘승우’는 한글을 그대로 늘여 만든 사인이다. 마음에 들어서 그 시안 그대로 부탁드렸다. 디자인 풀패키지가 도착했다.

문제가 있었다. 사인 작가님의 사인은 기가 막히게 멋졌지만, 볼펜과 내 솜씨로는 그 결승선 러너를 그대로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몇 번 따라 해보다가 손을 놓았다. 퇴고에 쫓기기 시작하면서 사인은 저 멀리 사라졌다. 잊을 만하면 알람처럼 어디선가 사인 이야기가 들렸다. SNS 댓글뿐 아니라 러닝 클래스에 나가면 러너들이 물었다. “책 언제 나오세요? 참, 사인 연습하고 계시죠?” 그럴 때마다 불안한 마음에 받았던 사인 패키지를 다시 꺼냈다. 결승선 러너 모양의 ‘정’을 끙끙대며 끄적거리다 실소가 터졌다. 정말 안될 것 같았다. 낭패였다. 출간일은 가까워지는데 이 엉망인 사인으로 대충 써드릴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책 예약판매가 시작되었다.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결승선 러너는 버리기로 했다. 지금 내 손으론 따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성은 버리고 이름 ‘승우’ 두 글자만 집중 연습하기로 했다. 종이 위에 대충 써보니 느낌이 괜찮았다. 이거다! 며칠 후 책을 예약한 러너들께 연락이 왔다. 내 책이 도착해서 그날 러닝 클래스 시간에 책을 들고 올 테니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기쁘고 좋으면서 한편으론 걱정이 커졌다. 말도 안 되지만 어디 멀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까지 올라왔다.

심호흡을 하고 오늘 러닝 수업이 예정된 트랙으로 출발했다. 사인을 해야 하는 첫날이었다. 사인이 뭐라고 책을 내는 것보다 더 떨릴까? 혹시 오늘 사인을 하다가 그분의 귀한 책을 망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이어리와 볼펜을 가방에 챙겼다. 트랙까지는 버스로 30분, 골든타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이어리를 꺼내 싸인을 연습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은 떡을 썰고 아들은 글씨를 쓰게 한 한석봉 어머니처럼.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승. 우. 승. 우. 승우... 흔들리는 차 안에서 정신없이 쓰다 보니 어느새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길 건너 트랙, 약속장소를 바라보니 다시 가슴이 떨렸다. 옆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1분 1초라도 아끼며 조용히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혹시 누가 볼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인을 쓰고 또 썼다. 앞뒤로 빼곡히 종이를 채우자 자신감도 차올랐다. 드디어 약속장소로 향했다.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러너 형석님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형! 제가 1호 사인이네요. 와, 영광이에요.” 움찔했다. 1호 사인을 망칠까 수심이 가득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생각해 둔 멘트를 적고 자연스럽게 새로 만든 이름 사인을 써 내려갔다.
“오! 느낌 있어. 느낌 있어요!” 주위에서 우릴 둘러싼 러너분들의 말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죄송하지만, 사실, 이 사인은 1시간 전 버스 안에서, 그리고 5분 전 옆 건물 안에 숨어서 급조한 서명입니다.’
몇 분의 책에 사인을 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도 그날의 기분을 담은 듯 의외로 멋졌다. 좋아하는 분들을 보면서 웃음이 났다.
“그래, 뭐 사인이 별 건가. 마음을 담아 정성껏 쓰면 그게 바로 멋진 싸인이지.”

작가에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는 퇴고가 아니라 사인일지 모른다. 누군가의 책에 처음 사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뮤지션 요조 작가님을 직접 뵙고 그분 책에 사인을 받았다. 가슴은 떨렸고, 마음은 벅찼다. 그날 사인회 영상에는 작가님께 고백하듯 행복한 얼굴로 말을 건네던 독자 분들과 그 마음을 기쁘게 받아주던 요조 작가님의 따스한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며칠 후 나를 처음 작가라고 불리게 해 준 내 책을 좋아해 주신 크루 분들과 약속을 잡고 사인을 하러 갔다. 몸 상태가 별로였지만,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했다. 아파서 운동은 못했지만, 약속한 대로 사인은 꼭 해드리고 싶었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아픈 몸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분들과 환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고 사인을 했다. 사인을 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사인을 받거나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환하고 빛나는 얼굴로 행복하게 웃고 있셨다. 그 표정 속엔 내가 요조 작가님 사인을 받으며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사인을 몇 번 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 누가 와서 사인을 요청해도 떨지 않고 할 배짱과 실력이 생겼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런 몇 번의 폭풍 같은 시기가 지나자 밤바다처럼 고요해졌다. 사인 실력은 늘었는데 사인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었다. 또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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