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낸다고 인생이 바뀔까

by 러너인

책을 내면 저절로 인생이 바뀌는 줄 알았다. 갓 제대한 군인처럼 책만 나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025년 3월 30일, 겁도 없이 한국 에세이 분야로 책을 냈다. 순위에 오르고 빨간 베스트셀러 딱지도 붙었다. 예약판매 1주 차에 한국에세이 100위 안에 들었다. 주식투자에 빠진 사람처럼 예스 24와 교보문고 순위를 들락거렸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내리는 순위에 마음도 들썩거렸다.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 에세이 분야는 경쟁이 치열했다. 분야를 너무 넓게 잡은 건 아닐까? 자기 계발 또는 운동 분야로 세분화해서 등록했으면 베스트셀러로 더 오래 남았을 것 같아서 아쉬웠다. 주간베스트나 분야별 베스트가 되려면 아주 작게 분야를 선정하면 쉽게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책을 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책을 쓰기 전에는 책을 낸 누군가를 우러러보았다. 책을 내자 달라졌다. 2쇄, 3쇄를 찍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이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나도 SNS에서 꾸준히 책 홍보를 했다. 금방 지치고 한계에 부딪혔다. 매번 작가가 자기 책을 홍보하는 건 피로도가 높았다. 게다가 그 대상이 이미 그 책을 산 SNS 친구들이라 효과도 적었다. 이미 독자이신 분들에게 계속 사달라고 조르는 모양새라 서로 불편했다.


책 내기 전에는 주변에 작가들이 보이지 않는다. 책을 쓰기로 마음먹는 순간 귀신같이 주위에 온통 작가들만 보인다. 나도 24년 1월, 작가가 되겠다고 출사표를 올리는 순간 “50대, 달리기를 할 줄이야”라는 막 출간된 달리기 책이 눈에 띄었다. 초보러너 때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추월해서 지나가면 따라잡으려고 애쓰듯, 막 50세가 된 내 책을 뺏긴 것 같아서 속상했다. 비슷한 나이이고 주제도 같았다. 다행히 나는 남자라서 느끼는 게 다르고 그간 다양한 경험과 울트라마라톤 도전까지 차별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닌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기로 했다.


초고를 쓸 때 또 달리기 책이 나왔다. 초보일 때 매일 10km씩 100일간 달리게 해 준 유튜버 해피러너 올레님이 “마라닉페이스”라는 책을 냈다. 책을 주문했다.

‘내가 왜 달리기 책을 낸다고 시작했을까. 비교되진 않을까. 난 유튜브 채널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 러너인데...’


24년 여름, 초고가 나왔다. 막 퇴고를 시작하는데, 그새 또 달리기 책이 나왔다. 미워할 수 없는 작가였다. 평소 제가 좋아하는 러너 막시 작가가 쓴 “산을 달리는 러너”. 이 책은 그나마 트레일 러닝에 한정된 이야기라 내 책과 겹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24년 겨울, 퇴고를 할 때였다. 내가 쓰는 책은 다른 달리기 책과 달리 100km 울트라마라톤 대회까지 포함된 차별화된 러닝책이라고 뿌듯해할 때 온라인 러닝크루 갱런 동기도 책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열심히 사는데 재미가 없는 너에게”라는 책. 나는 겨우 100km 울트라마라톤 완주 이야기를 책에 넣었는데, 대한민국 종단, 횡단 수백 km를 몇 박 며칠로 달리는 울트라마라토너의 책이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표지를 정할 때였다. 인스타그램에 또 달리기 책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표지 선정 설문조사 중인 “내가 좋아하는 것들, 달리기”라는 책이었다. 상큼한 표지와 아름답고 건강한 러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출시일도 내 책과 같은 그분의 책에 동료의식을 느끼고 내 SNS에 소개와 응원을 보냈다. 나는 조금씩 작은 마음을 넘어서고 있었다.


25년 3월 30일,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다. SNS를 열자 입이 딱 벌어졌다. ‘마의 2시간 30분’ 벽을 돌파하며 대한민국 여자 마라톤의 새로운 역사를 쓴 권은주 감독님의 책 “인생에 달리기가 필요한 시간”이 내 책과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동네 축구장에 손흥민 선수가 나타난 것처럼. 왜 하필이면 지금... 헛웃음이 났다. 평소 존경하는 감독님이라 바로 책을 주문하고 나는 듯이 북토크에 달려가서 축하드렸다. 감독님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훈련에 도움이 되고 러너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었다.


초반에 반짝 베스트에 오른 내 책과 달리 처음부터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감독님의 책을 보곤 작아질 때도 많았다. 책은 무엇을 담았는가도 중요하지만, 결국 자신의 영향력의 크기만큼 알릴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스레드 앱에서 알게 된 작가님들 중 세바시에 나가고 서점 MD의 선택을 받아 자신의 책을 널리 알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판매지수가 조금씩 낮아지면서 숫자놀이에 무덤덤해졌다.


출간 후 부푼 마음과 기대가 사라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변한 게 있었다. 책을 준비할 때는 만나는 사람들이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괜히 놀리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책을 내고 나선 “작가님” 호칭이 익숙해졌다. 스스로를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부르는 분들과 달리, 솔직하게 내가 아직 1쇄를 파는 중이라는 걸 SNS에 스스럼없이 대놓고 보여줄 용기가 생겼다.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 발전이 시작된다. 내가 한강 작가나 연예인이 아니고 나의 영향력이 수백 명에 그치는 상황임을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베스트셀러의 성공공식을 따를 수는 없었다. 출판계의 생리와 문법을 모르고 별도의 네트워킹 지원이 없는 초보작가의 한계를 느꼈다.


오기가 생겼다. 마흔여섯에 달리기를 시작한 자체가 도전이고, 그 달리기로 책까지 낸 내가 오리지널이니까. 닥치는 대로 SNS에 글을 썼다. 다양한 사례와 상황에서 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의 사연을 재미있거나 감동적으로 적기도 했다. 물론 그 노력이 책의 판매지수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나만의 홍보방식을 끊임없이 찾고 몸으로 부딪혔다.


한 때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였던 마라톤과 그보다 더 큰 도전인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며 느낀 게 있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체력적 한계를 넘는 경험과 발톱을 바꾸기도 했지만, 그 도전의 순간들이 내게 도전의 DNA를 새겼다. 책이 안 팔려도 상관없었다. 저자인 내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남들이 잘하지 않는 오디오북을 선택했다. 지원사업 기획서를 직접 쓰고 낭독자로 모시고 싶은 요조님께 연락드려 직접 모셨다. 그분이 낭독하시는 날이면 연차를 내고 서울로 달려가서 그 시간을 온전히 내 삶에 기록했다. 1분 1초, 숨 쉬는 시간조차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모든 게 내가 선택한 시간이었으니까. 달리기처럼


오디오북 제작 담당 대리님이 내게 말했다.

“작가님처럼 이렇게 정성스럽게 녹음 때마다 오시는 작가님은 안 계세요. 보통 처음에만 잠깐 와서 인사하고 녹음 현장만 잠시 둘러보고 가시거든요. 그런데 승우 작가님은 녹음 때마다 미리 오셔서 끝까지 자리 지켜주시잖아요. 게다가 매번 간식까지 챙겨주시고요. 책 너무 재밌어요. 듣다 보니 저도 녹음 끝날 때쯤엔 러너가 되어있을 것 같아요.” 그는 진짜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책을 투고할 때도, 오디오북에 지원할 때도, 책방무사에 방문했을 때도, 요조님께 메일을 쓸 때도, 골든타임에 다른 작가님을 응원하러 북토크에 다닐 때도, 요조님이 오디오북을 녹음하러 스튜디오에 오시는 순간마다. 다른 누군가 차려준 밥상에 품위 있게 밥을 먹다가 남기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씨를 뿌리고 수확까지 해야 해서 더 소중했다. 밥상에 올라온 밥 한 공기가 얼마나 간절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인지 아니까.


나는 이 글을 보는 예비 작가님들이 나처럼 처음부터 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고생했으니 당해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힘들고 절망스럽고 아파봤으면 좋겠다. 하얀 밤을 새워 쓴 책이, 87세 어머니와 둘이 주말마다 13시간씩 퇴고해서 낸 책이 처음에만 반짝하고 서점 구석에 세워진 모습을 지켜봤으면 좋겠다.

나 혼자 정체되어 있고 다른 작가님들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완전히 바닥까지 가보고 다시 일어나 힘차게 달렸으면 좋겠다.

25년 3월 30일에 레전드 마라톤 감독님과 동시에 책을 낸 나처럼. 그래야 오디오북 녹음날마다 낭독하시는 요조님 유리창 건너편에 앉아서 가슴에 차오르는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을 테니. 간절하게 기다린 오디오북 지원사업 선정소식에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뛰어오를 수 있을 테니. 동네 도서관에 전화해서 내가 저자인데 돈 한 푼 안 받아도 되니 북토크 한 번 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배짱과 거절당할 용기를 배울 수 있을 테니.

책을 내면 인생이 달라지는 줄 알았다.

책을 내고 알게 되었다. 책이 잘되지 않을수록 인생이 바뀐다는 것을. 무릎 꿇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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