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 있는 사람책이다

by 러너인

"집은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IMF 한파 속에서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아직 해고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척하는 이들. 하지만 집을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오다 보면 어느새 등산로 앞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양복을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에 오른다. 후회와 한탄, 분노와 서글픔을 곱씹으면서. IMF가 직장인들을 산으로 출퇴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7일"


"집은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40대 중반, 번아웃 속에서 자신을 잃은 가장이다.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을까 봐 어디에도 힘든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주말 아침마다 일이 있는 척하는 나. 하지만 집을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오다 보면 어느새 도서관 앞이다. 나는 이곳에서 애써 슬픔을 감추며 자리에 앉는다. 후회와 한탄, 분노와 서글픔을 곱씹으면서. 번아웃이 나를 도서관으로 출퇴근시키고 있는 것이다. - 정승우 작가, 2020년 1월 17일"


마흔다섯에 번아웃이 왔다. 밥 먹듯 되풀이된 야근과 스트레스도 원인이었지만, 뭐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상황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회사와 집 어디에서도 쉴 곳은 없었다. 자존감을 깎는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기 시작했다. 무능하다고 누군가 비난하면 무능하다고 믿고, 게으르다고 하면 정말 내가 게으르다고 믿었다. 나는 조금씩 나를 죽이고 있었다.


우울증, 갱년기, 번아웃. 이런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냥 묵묵히 달려오다가 한 순간에 방향성을 잃은 것 같았다.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출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기라는 말도 그때에 내게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렸다. 세상에는 즐길 수 없는 고통이 있으니까.


주말에도 쉼터는 없었다. 집에서도 회사처럼 뭔가를 끊임없이 강요받고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압박을 느꼈다. 세상의 돈을 다 쓸어 담는 듯 말하는 유튜버들의 돈 벌기 영상이 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고,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온 내가 가치 없는 삶을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 친구 아들 이야기처럼 누구 남편은 성과급을 몇 천만 원 받았고, 누구 아빠는 어디 집에 투자해서 몇 억을 벌었다는 말이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책을 많이 보면서도 왜 자기 계발을 안 하고 나아지는 게 없냐는 말도 가슴 아팠다. 귀한 시간에 돈도 안 되는 글을 쓴다는 따가운 눈총에 나는 입을 닫았다. 집도 회사처럼 나를 옥죄고 있었다. 실적과 숫자로 말해야 하는 영업사원처럼 모두가 나에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진짜 내가 무능한 사람일까? SNS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보다 루저의 삶을 살고 있을까? 직장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일을 못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고, 팀원으로 지낸 기간보다 팀장으로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항상 맡은 일에 성실히 임했고 가치를 높이는데 마음을 쏟았다. 운명처럼 회사에서 동료들과 멀어진 계기가 있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었다.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회사에서 외톨이가 된다고 해도 버틸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마음으로 회사에서 외톨이가 되었지만 결국 집에서도 이방인이 되었다.


"네가 뭐가 힘들어? 멀쩡하게 직장 다니며 편하게 살면서."

전쟁, 대형재난 생존자들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것처럼, 삶에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생존을 위해 묵묵히 나를 맡겼지만, 더 힘든 사람들 틈에서 내가 떠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세상은 입술에 손가락을 세우고 내게 말했다. '쉿. 조용히 입 닫고 꾸역꾸역 버텨. 그게 인생이야.' 집에서 수다를 떨면서 털어버리고 싶었지만 가족들도 내 말을 들어줄 틈은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고통에 빠져있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출근하면 기다렸다는 듯 견디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고, 밤 10시 넘어 퇴근하면 자취생처럼 내 방에서 들어가서 몸을 뉘이고 죽은 듯 자고 좀비처럼 집을 나와 회사로 갔다. 루저라는 누군가의 말에 나조차 동의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주말에 집에 있으면서 자기 계발 안 하냐는 이야기에 숨이 막혔다. 숨 쉬러 어디로든 나가야 했다.


돈들이지 않고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딱 한 군데뿐이었다. 도서관. 주말마다 갈 곳이 없고 만날 사람이 없어 하염없이 걷다가 집 앞 도서관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 책이라도 보자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니었다. 별다른 취미 없이 야근만 반복하며 살다 보니 독서하는 습관도 놓아버린 지 오래였다. 책을 펼치면 졸리고 목적 없이 앉아있는 나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해서 자책하며 엎어져서 잠이 들었다. 자다 깨다 멍하니 하루를 보내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자기 계발 열기로 뜨거웠다. 무기력한 나와는 달리 어린 학생들부터 나이 든 어르신까지 대부분 시험, 자격증, 독서에 빠져있었다. 무언가 열심히 쓰고 인터넷 강의를 듣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더 작아졌다. 억지로 책을 꺼내 들었지만 읽히지 않았다. 책을 본다는 행위조차 누군가에겐 배부른 일이라는 것을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나는 겨우 깨달았다.


주중에는 출퇴근 버스 안에서 잠시 인공호흡을 하듯 숨을 쉬고, 주말에는 IMF때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산으로 출퇴근하듯 도서관으로 출퇴근했다. 책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아닌 무기력한 시간. 멍하니 있다가 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데드맨 워킹. 집과 회사를 오가는 내가 마치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장으로 향하는 죄수 같았다.


달간 의미 없이 도서관에 출퇴근했을 무렵,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재미나 살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다. 만보 걷기 시작 후 2개월이 지나며 조금씩 걷고 뛰게 되고 달리면서 지워버린 나를 조금씩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잘 보일 사람도 없다고 아무렇게나 나를 대하는 자신을 새롭게 대하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더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피하기만 하던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SNS를 시작하면서 달리는 나를 셀카로 찍고 올렸다. 뜨겁게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스스로 가둔 그 도서관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이 필요했다. 나보다는 가족이 최우선이고,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일이 미안하고 낯설었다. 그게 남자의 삶이고 가장의 의무라고 믿었다. 글이 쓰고 싶었다. 노트북 하나도 사치인 삶이 답답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14만 원짜리 노트북을 발견했다. 퇴물이라 여긴 그 물건을 누군가 사간다는 사실에 들뜬 판매자는 싱글벙글했지만, 내게 그 노트북은 보물이었다. 나는 그 보물로 아픈 시간들을 버텨냈다. 첫 출간을 위한 투고 글을 써서 25년 3월, 결국 책을 출간했다. 나는 지금도 그 노트북으로 글을 쓴다.


처음엔 글이 써지지 않았다. 어디서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었다. 그저 아픈 감정들이 너무 생생해서 글로 풀어내야만 숨 쉴 수 있었다. 주말이면 새벽에 1시간 달리고 와서 씻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두세 시간 동안 인스타그램 피드에 글을 써서 올렸다. 글을 쓰기 위해 달리고 달리기 위해 글을 썼다. 쓰고 달리고 생각을 비워내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치유되는 나를 느꼈다. 비대면 소통일지라도 누군가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SNS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며 배우기 시작했다.


5년 뒤 바로 그 도서관에서 나를 사람책으로 등록했다. 그때의 나처럼 힘들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주고 싶었다. 산에 가는 심정으로 도서관 5층에 앉아 있을 당신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25년 8월 4일, 용인 도서관에서 휴먼북 라이브러리에 등록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필름이 돌아가듯 5년 간 달려온 수많은 장면들이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 휴먼북을 신청하면 서로 시간을 조율하여 재능기부로 도서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책 도서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를 보낸다.

5년 전엔 도서관으로 숨으러 갔지만, 지금은 누군가를 살리러 간다. 내가 바로 살아 있는 사람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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