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게 뭐예요?”
“영정사진이다. 나는 이제 언제든 갈 나이가 되었다. 내가 죽으면 어차피 네가 올 테니, 잘 가지고 있어라.”
오늘은 올해로 87세가 되신 엄마의 생신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글 쓰시는 엄마와 식사 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본인의 영정사진이 담긴 액자였다.
집에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엄마가 건넨 사진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화선지로 곱게 싼 액자 위에는 엄마의 손글씨로 “영정사진”이라고 적혀 있다. 손에 액자를 들고 가만히 그 사진을 바라보는데 마음 한구석이 먹먹하다.
엄마는 차분히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셨다. 우리가 언제라도 이별할 수 있다는 걸 아시는 엄마는, 나중에 남겨질 내가 당황하지 않도록, 당신의 생일날 미리 내게 영정사진을 건넸다.
한편으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시면서, 여전히 첫 출간이라는 나의 새로운 도전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함께 해주신 엄마. 나는 엄마에게 어떤 아들일까 생각해 본다.
가끔은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늦은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해서 첫 책을 준비하며 다시 엄마를 웃게 한 아들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2025년 3월 출간을 목표로, 작년 초부터 첫 달리기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 여름, 초고를 마친 후 엄마에게 보여줄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책이 나왔을 때 말씀드릴까?' 망설이다가 결국 초고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얘, 너 지금 책 낼 때 아닌 것 같다. 다시 고민해 봐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속상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네 초고는 감정이 정제되지 않아서 한참 다듬어야 한다. 예술은 옷을 벗는 것 같지만, 아름답게 벗는 것이 예술이다. 그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이 글이 아니다. 며칠 조용히 네 글을 다시 읽어봐라.”
처음엔 속상했지만, 엄마의 말씀이 맞다는 걸 느꼈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글이 아니라, 정제된 예술이 글이라는 엄마의 말이 내 가슴에 남았다.
그날부터 우리는 따로 또 함께 퇴고를 시작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놓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몇 달을 보냈다. 의견조율이 때로는 쉽지 않았지만, 그 시간들은 엄마와 나에게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고 특별했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이가 들어 사실 힘이 들고 눈도 아프지만, 아들의 첫 책이,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리면서 이렇게 바뀔 수 있음에 놀랍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 모르지만, 힘들고 피곤해도 이것이 내가 아들한테 주는 생의 마지막 유산이고 선물이라 생각하고 의견을 주고 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책은 단순히 내가 쓴 책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쓴 책이라는 것을. 엄마는 글 속 나의 달리는 삶을 지켜보며 옆에서 함께 달려 주셨다. 함께 퇴고하는 시간을 통해, 엄마와 글로 깊이 연결된 것은 내 삶의 선물이고, 그 자체로 새롭고 소중했다.
퇴근 후 틈나는 대로 퇴고를 했다. 원고를 보다가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내 원고를 보고 계실 나이 드신 엄마를 생각하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퇴고를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일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급한 일인가 놀라 여쭤보니, 출간 원고를 읽고 있다가 내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전화하셨다고 했다.
“승우야. 네가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대단해서 칭찬하려고 연락했다. 사실 지난 4년간 네가 달리기를 시작해서 달라졌다는 건 알았지만, 네가 삶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킨 줄은 몰랐다. 이제 나는 걱정이 없다. 네가 달리면서 사람들과 연결되며 한계를 이겨내는 힘을 길렀다는 걸 이제 알았으니까.”
책 출간만큼 귀한 것은 원고를 통해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해와 응원을 나누며 퇴고하던 시간이었다. 퇴고를 모두 마친 날, 나는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아들입니다. 오늘은 참 기쁘고 기쁜 날입니다. 드디어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제가 에세이 책을 쓸 줄은 몰랐고, 그것도 달리기를 소재로 쓸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하지만 아픔과 단절, 외로움 속에서 달리기가 제 손을 잡아 주고, 더 큰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가다듬지 않은 초고라서 처음에는 글을 보이기 부끄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소중한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말마다 카페에 앉아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더 좋은 표현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순히 글을 고치는 시간이 아니라, 어머니와 제가 글로 하나의 작품을 쓰듯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안목에 제 글이 닿지 않을까 부담도 되고, 서로가 가진 생각의 차이와 세대 차이로 인해, 문체나 내용이 너무 수필집처럼 건조해질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머니에게 오픈하고 열린 마음으로 퇴고를 시작한 것이 얼마나 귀한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책은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더 나은 글을 만나기 위해 함께 마음으로 달리며 쓴 책이기도 합니다.
첫 책은 누구나 잊을 순 없지만 어머니와 함께 퇴고한 이 책은 제게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가끔 낮에 일하다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곤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퇴고하시다가 글에 담긴 제 도전과 경험에 감동해서 기쁜 목소리로 제게 전화주시던 순간도.
그저 달리고 완주했다는 것을 넘어, 글을 쓰고 자신을 돌아보며 사람들과 깊숙이 연결되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아들의 변화를 글에서 보고 느끼신 어머니. 그 누가 서로의 변화를 이렇게 깊이 느끼고 완전히 알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제가 썼지만, 한편으론 어머니와 함께 달리며 쓴 책입니다. 앞으로 책이 나오면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어머니,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