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서 그랬나 봐

by 러너인

성년이 된 아이와 실랑이가 있었다. 먼저 아이가 여행 계획을 꺼냈다. 위험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라 당황해서 반대 의견을 비췄다.

아이가 내 말을 가볍게 듣고 강행할 태세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정 너 뜻대로 하려면 정식으로 엄마 허락을 받고 가라고 했다. 늦은 새벽, 아이의 톡을 본 아내가 방으로 달려갔다. 한참 실랑이가 이어졌고, 나는 런클럽 훈련 시간에 맞춰 조용히 집을 나섰다.

운동을 마지고 다시 집에 들어오니 조용하다. 아이방 문을 연다. 아이는 펑펑 울고 있다. 비난의 말에 상처받은 얼굴이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차라리 내가 더 강하게 말리고 먼저 막았어야 했나. 괜히 상처를 준 게 아닌가 마음이 안 좋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운동 후라 배가 고프다. "밖에 같이 뭐 먹을까?" 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식욕도 없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단다. 일단 방에서 나와서 잠시 나갈 준비를 하고 다시 물었다. "오늘 일정 없을 테니, 나랑 나가서 국수라도 먹자. 응?" 아까는 완강히 거부하던 아이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같이 집을 나선다. 고집을 꺾는 과정에서 심한 말을 들어서 속이 상한 것 같다. 아이의 계획도 지나 져서 위로의 말을 찾기가 어렵다. 내가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돈다. 버스에서 내렸다. 국숫집으로 향하려다 바로 눈앞에 있는 초밥집이 보인다.

평소 초밥을 좋아하는 아이가 생각난다. "우리 국수 말고 초밥 먹으러 갈까? 이럴 땐 맛있는 거 먹는 게 좋겠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를 잡고 2인 세트를 시켰다.

새우튀김도 시켰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본 직원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곧 맛있는 초밥세트가 눈앞에 놓인다.

말없이 식사를 한다. 아이가 조금씩 눈물을 닦으며 초밥에 손을 뻗는다. 초밥이 한두 점 사라지면서 눈물도 조금씩 잦아든다. 어느새 아이는 식사에 집중한다. 아이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배고파서 그랬나 봐. 그래서 아까 더 슬프고 우울했나 봐.”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스레드에서 암에 걸렸다가 회복된 어느 분이 올린 투병일기를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시원하게 물 한잔 마시는 것조차 부럽다는 말, 밥이 너무 먹고 싶다는 말, 그래도 엄마를 영영 못 보는 건 죽음보다 더 두려워서 버텼다는 말, 때론 어설픈 위로가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말.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아픔의 기록들...

그 글을 보며 난 슬펐고 힘든 그에게 사람들이 해준 나쁜 긍정이 미웠다. 그래도 잘 이겨내고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글을 쓰는 그의 용기에 뭉클했다.

아이는 글을 다 읽고 조심스레 입을 연다. “나도 최근에 살이 많이 빠졌어. 어디 아픈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그래. 넌 지금 여행이 아니라 병원에 가는 게 먼저야.”

아이가 웃는다. “알았어. 다음 주에 바로 병원부터 가볼게.” 새우튀김을 한 개 시켰는데 서비스로 3개를 더 주셨다. 아이가 바삭한 새우튀김을 깨물며 웃는다. “불쌍해 보여서 많이 주셨나 봐.”

어떤 긍정은 가끔 독이 되고 상처가 된다.
"나쁜 긍정"이란 책을 보고 오늘은 평소 아이에게 늘어놓던 교과서 같은 긍정의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맛있는 걸 같이 먹기로 했다. 아이가 말했듯이 배고파서 그랬을 수 있으니.

응원의 말을 다시 쓴다.

넌 지금 괜찮지 않아.(나쁜 긍정: 괜찮아질 거야.)
얼마나 힘들까. 울고 싶은 만큼 울어! (나쁜 긍정: 울지 마)
억지로 웃지 마 (나쁜 긍정: 그냥 웃어넘겨)
그건 감사할 일은 아니야 (나쁜 긍정: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아. (나쁜 긍정: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야)
억지로 좋게 생각하지 마. (나쁜 긍정: 적어도... 는 아니잖아.)
너의 생각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야. (나쁜 긍정: 태도의 문제야)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도 괜찮아. (나쁜 긍정: 부정적인 건 생각하지 마)
용감하게 포기해도 돼 (나쁜 긍정: 포기하지 마)
어떤 일에는 이유가 없어. (나쁜 긍정: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가끔은 긍정의 말 대신, 좋아하는 음식을 조용히 함께 먹자. “배고파서 그랬나 봐.”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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