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곳은 트랙이 아니다. 열정 가득한 러너들이 넘실대는 거대한 '바다'다. 서리 내린 트랙은 은빛 물결로 반짝이고, 말발굽 같은 규칙적인 발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하지만 오늘 나는 준비된 준마가 아니다. 발도 조금 불편하고 몸도 무겁다. 마치 공기가 빠져버린 풍선처럼 땅에 붙어 달린다. 말발굽에는 아디오스 프로 4가 달렸지만, 발걸음은 날지 못한다.
오늘 목표는 풀코스 3시간 30분 목표 페이스 조에서 30km를 빌드업으로 달리는 것. 525로 시작해서 505까지 속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바나나런클럽 열차가 출발한다. 출발부터 몸이 무겁다.
10km 때 먹으려던 에너지젤을 5km에서 뜯는다.
약기운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 다행히 효과가 있다.
열차는 10km를 지나 20km로 향한다.
피트니스플레이 크루 러너들도 한쪽에서 함께 달린다.
저번 피플 번개 인터벌 훈련 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뒤에서 함께 달리던 희란님이 한마디 한다.
"아, 힘들어. 너무 힘들어."
나도 가까스로 버티고 버티던 상황이라, 무심코 이렇게 대답해 버렸다.
"다 힘들어요."
공감의 말 대신, 현실적인 한마디.
뒤에서 듣던 혜준 님이 빵 터졌다.
"악, 근데... 승우님 감성러너신데... 아, 웃겨. '다 힘들어요'라뇨?"
나도 당황해서 멋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INTJ라 사실 현실에선 파워 TJ예요.
근데 글을 쓸 땐 감성이 살아나요. 저도 정말 신기해요."
그날 이후, 오늘 트랙에서 다시 만난 희란 님과 열차에서 마주칠 때마다 "오늘은 저만 힘들어요!"라며 서로 웃으며 응원을 나눈다.
바나나 열차는 20km를 지나 30km로 향한다.
속도가 빨라진다. 점점 열차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25km에서 다시 에너지젤을 먹는다. 35km까지 버틴다는 계획이었지만 30km까지만 버티기로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마침내 30km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렸다.
조금 더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발등이 불편하고 몸도 무거운 날이니, 적당히 마무리하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마지막까지 달리는 330 목표조 러너들, 수영님과 경진님을 응원하며 숨을 고른다.
【기록이 아니라 과정이 남는다】
그때, 한 러너가 다가왔다. 나이 많은 선배 러너다.
본인은 풀코스를 100회 넘게 달렸는데, 오늘 보니 여기 트랙엔 서브쓰리 할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며 묻는다.
"여긴 무슨 크루예요? 서브쓰리 주자가 몇 명이예요?"
(참고 : '서브쓰리'란 마라톤 풀코스 42km를 3시간 이내로 달려서 완주하는 기록 달성을 의미하며, 많은 아마추어 러너들이 욕심내어 이루려고 하는 목표)
그 순간, 마음이 조금 씁쓸해졌다.
나는 러닝을 단순히 속도와 기록으로만 정의하는 시선이 조금 불편하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 필요 없고, 예뻐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랄까.
물론, 서브쓰리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그런 분들의 노력과 업적은 충분히 멋지고 아름답다.
하지만 내게 러닝은 조금 다른 의미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러닝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단순히 풀코스를 몇 번 더 뛰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더 성숙한 생각과 태도를 가지는 것.
러닝을 배우려고 런클럽에 다니지만,
러닝 실력은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척도일 뿐,
우쭐대거나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니까.
그래서 가끔 너무 서브쓰리 중심적인 시선이 거북할 때가 있다. 마치, 러닝의 가치를 오직 기록으로만 가늠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
하지만 러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달려왔고,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게 바로,
진짜 '러너의 마일리지'가 아닐까?
나는 그저 풀코스를 많이 뛴 러너가 아니라,
바르게 달리며, 더 나은 삶을 향해 달려가고 싶다.
사실 러닝도 인생도,
양보다 질이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