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코스는 끝이 아니다

by 러너인

42.195km를 달렸다. 출발 직전까지 복장은 당초 올린 레디샷처럼 싱글렛과 짧은 검정 레깅스였다. 추워도 버텨보겠다던 의지는 차에서 내려 밖에 나오자마자 깨졌다.

미친바람에 온몸이 얼얼하다. 복장계획 전면 수정. 싱글렛 안에 보스턴마라톤 바람막이를 입고, 밑에는 혹시 예비로 준비한 빨강 레깅스를 덧입는다. 멋 내려고 입은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입었다.


화장실 가느라 부실한 웜업을 뒤로하고, 출발 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빨간 내복 멋있어요!" 지나가는 러너가 말을 건넨다. 러너들이 달린다. 누구는 날아가듯 가볍게, 누구는 이를 악물고, 누구는 얼굴을 찌푸린 채 달린다. 서브 3 주자도, 서브 4, 서브 5 주자도 모두가 자신이 선택한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는 오늘 5:16 페이스로 사랑에 빠지기로 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서브 3 페이스로, 누군가는 울상을 지으며, 또 누군가는 천천히 걸으며. 오늘 이곳을 달리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나도 내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기로 한다.


33km쯤, 갱러너 기태님이 옆으로 다가온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다리가 무겁고 느리다. 35km, 뒤에서 점점 커지는 소리. 추임새처럼 전의를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응? 혹시 페이스메이커 그룹?" 만나면 안 되는 만남이 떠올라 불안해진다.


이미 3시간 30분 목표 페이스메이커 그룹은 떠나보냈다. 40분 정도에 들어올 생각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3시간 45분 목표 페이스메이커 팀이 다가온다. 아찔하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어느새 나는 달리는 그룹 사이에 있다.


당황스러움은 잠시뿐, 오늘은 반갑다. 그들의 열정적인 파이팅에 다시 힘을 낸다. 맞바람이 사정없이 빰을 때리고 온몸을 차갑게 두드린다. 힘찬 구호에 맞춰 나도 속도를 높여 그들과 한 배를 탄다. 채찍질을 하며 노예들에게 노젓기를 시키는 갤리선이 떠오른다.


갤리선이 속도를 높인다. 영차. 하나! 영차. 둘! 빨리 다리를 젓자! 다만 우리는 노예가 아닌 주인이다. 언제든 같이 노를 젓고 언제든 갤리선을 벗어나 더 빠르게 달릴 자유가 있다. 페이스가 점점 빨라진다. 쾌속선처럼 배가 나아간다. 이제 39km. 남은 거리 3km.


무겁던 내 다리가 점점 살아난다. 비행기를 띄우는 활주로처럼 3:45 페이스조와 발을 맞춘다. 활주로가 열린다. 맞바람을 뚫고 속도를 끌어올린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이륙하듯 나는 페이스조를 벗어나 빠르게 달린다.


몸을 하늘 높이 띄운다. 40km는 4:59, 41km는 4:53 페이스로 달린다. 42km 4:25. 마지막 스퍼트는 3분 56초로 달린다. 이제 남은 거리는 1km. 페이스를 4:25초로 끌어올린다. 앞서가던 진이의 등이 보인다. 반가움에 달려가서 인사 나누고 냅다 달린다.


피니시 라인이 보인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다. 반가운 사람들, 목소리. 순철님과 수영님이 피니시에 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비키 님, 수진님과 사진 찍으러 가는 길에 인친 보나 님을 만난다. 대회장에서 만나는 기쁜 만남.


집에 오니 집안일이 기다린다. 씻고 잠시 눈 붙이려던 생각을 밀어놓는다. 갑자기 웃음이 난다. 몇 년 전에는 풀코스를 달리고 오면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니느라 당일에는 일상생활조차 힘들고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짜증이 났다. '풀코스 뛰느라 힘들었는데 꼭 지금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다르다. 평소처럼 잘 걷는다. 풀코스를 뛴 티를 내지 않는 것. 강추위에 달리느라 피곤해도 괜찮다. 오자마자 정리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널고, 씻고 화장실 청소를 마쳤다. 자동차 청소를 하러 밖에 나가서 마무리하고 들어오자마자 분리수거까지.


풀코스를 달리고 난 후에도 일상이 가능하다는 것. 풀코스를 뛴 티를 내지 않을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는 것. 나는 완주보다 그것이 더 기쁘다.

훈련의 힘. 일상의 힘.

“마녀체력”처럼 풀코스 완주가 내게 준 진짜 선물은 일상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사람들과 함께 뛰고, 성장하며 쌓아온 훈련의 시간들. 완주보다 더 기쁜 건 대회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완주 후 더 힘차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다.

풀코스는 목적이 아닌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대회의 결승선을 넘어 오늘도 나는 계속 달린다. 삶의 주로 위, 일상의 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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