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불륜(파울로 코엘료)'을 반추하다.
며칠 전.
남들 다 일하는 평일날, 좀처럼 갖기 힘든 휴가를 얻었다.
'하루 휴가'라니, 생각만 해도 미칠 듯 기쁜 일이다.
마음 속에 담아둔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으나, 생각끝에 가장 마음이 잘 통하는 절친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목적지는?'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 모든 걸 놓고, 잠시나마 호흡을 깊게 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자연과 나 자신을 바라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 눈물 날 만큼 감사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로 향할 것인가 등의 고민은 사치이다.
'나'를 챙겨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이 짧은 '휴가'를 한없이 만끽하리라 다짐하며 차를 몰고 나선 길이었다.
결혼 생활 11년차.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직장 생활까지 병행하다보니,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결혼 이전엔 미처 몰랐던 상상 이상의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특히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롯 엄마라는 이름만으로 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대단히 무모한 생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쨌건 내 몸은 바스러질 듯 날마다 한계치를 초과하는 많은 일들을 이겨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갓난 아이를 안고 새벽 어스름 빛을 맞이했을 때 그 피곤함 뒤에 묻어나오던 눈물들과 가슴아림은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일상에 치여 결혼을, 인생을 고민해 볼 시간도 없이, 한없이 가라앉으려 했던 날들을 일으켜 세우고 세워서 맞이한 오늘이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 힘들었던 시간의 양만큼 보다 더 성숙한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날씨는 쾌청했다.
2월의 끝자락 들녘은 곧 다가올 봄기운을 충분 머금고 있었다. 나뭇가지에는 새잎들과 꽃봉오리들이 한가득 숨어, 아름다움을 터뜨릴 날들이 곧 임박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간간 불어오는 바람에는 다소 스산한 겨울느낌이 남아있었지만, 한 낮 내리쬐는 햇살은 몸과 마음을 나른하게 만드는 봄 특유의 기운이 가득이었다. 어느 한 순간엔, 따사로운 햇빛에서 초여름의 기운마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과 평생 모든 것이 지금과 똑같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이에 갇혀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여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고.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다보니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세상이 얼마나 큰 지 인식하게 된다고.
지평선은 구름과 집의 담장 너머로 훌쩍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는 건 계절 탓이 아니다. 밤이 찾아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면 나는 모든 것이 두렵다. 삶, 죽음, 사랑 혹은 사랑의 결핍. 새로운 모든 것이 단숨에 습관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반복될 판에 박힌 일상에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아무리 흥미진진하고 흥분되는 것일지라도, 미지의 것을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찾아드는 순전한 공포까지."
문득, 작년 봄에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파울로 코엘료가 쓴 '불륜'이라는 소설의 한 부분이다.
한가로이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할 때면, 어김없이 나라는 존재의 미미함을 느낀다.
자연은 끊임없이 피고 지고 변화하는 데 비해, 나는 항상 제자리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밀려올 때도 있다. 판에 박힌 습관적 일상에서 벗어나 더 나은 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기도 한다. 살면서 눈앞의 닥친 자잘한 일들에서 오는 고민 속에 허우적 댈 때도 많다. 하지만 어쩌면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를 잠 못 들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루 하루 다가오는 미지의 것을 대면해야 하는 공포와 같은 불안감, 그것인 듯도 하다.
"아무런 열의를 느낄 수 없는 낮과, 행복했던 과거의 모습들, 지나가 버린 일들에 대한 회한과 감행하지 못한 모험에 대한 갈망과,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가 있을 뿐."
명망있는 신문사의 인정받는 기자이자, 재력있는 남편과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린다'는 이렇게 읊조린다.
그녀는, 주어지는 외부현실에서 가해지는 압박감에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유일한 반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작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그녀의 결혼 생활을 통해, 그 속에 담긴 말 못 할 내면의 여러 단상과 심리들을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성 심리를 그리 잘 묘사를 했는 지 신기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주인공을 남성으로 뒤바꿔서 생각해도 될 듯하다.
작가는 여성이건 남성이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외로움이나 질투, 증오 등의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결혼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 쯤 생각해 봤을만한 결혼 생활의 의미와 진정한 행복에 대한 고민을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륜이라는 상황 설정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사랑은 그저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예와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영감뿐만 아니라 큰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작가는, 결혼 생활에서 사랑의 유지가 어려움을 역설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는 좀 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여직 어려운 화두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인생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다.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 나를 선택한다. 인생이 왜 내게 기쁨과 슬픔을 안기는지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과 슬픔으로 무엇을 할 지는 결정할 수 있다.'
작가의 말대로 인생이 나를 선택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면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을 그냥 받아들이되 그것으로 무엇을 할 지 결정할 수 있다는 표현은 대단 매력적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기쁨을 더 살리고, 그 기쁨을 원동력으로 나의 인생을 새롭게 재구성 하는 것!……. 그리하여 다가오는 미지의 것들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것. 더 이상 그것들을 불안의 눈길로만 바라보지 말 일이다.
봄의 길목이다.
'인생이란 긴 휴가가 아니라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라는 문장과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문장을 나직이 읊조려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생은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다가오는 새 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