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장석남의 배를 매며'와 '김사인의 선운사 풍천장어집' 관찰記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서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최근에 읽은 시 중, 단박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시! 비유가 참신하다.
호젓한 바닷가에 앉아있다가, 어디선가 던져진 밧줄을 엉겹결에 붙잡아 배를 매는 그 누군가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다.
우연히 날아든 밧줄을 잡는 것처럼 사랑은 예기치않게 시작되는 것임을.
그렇게 사랑은,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매어짐을 시인은 한껏 잔잔하고 담담하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빛 가운데 떠 있을 배를 그려보다가 '내 사랑은 어떠했던가?혹은 어떠한가?'라는 생각에 한참동안 잠기게 만드는 멋진 시다.
사랑에 따르는 온갖 과정들은, 때로 우리를 지치게 하고 때론 그 마음을 접어 무(zero)의 상태로 돌아서게도 만들지만, 어쨌든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가치롭고 숭고하다.
그 무엇도 사랑만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는 듯하다.
이것이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사랑을 져버릴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선운사 풍천장어집」 김사인
김씨는 촘촘히 잘도 묶은 싸리비와 부삽으로
오늘도 가게 안팎을 정갈하니 쓸고
손님을 기다린다.
새 남방을 입고 가게 앞 의자에 앉은 김씨가
고요하고 환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이번에는 얼마 전 출장길에 신문에서 우연히 보게 된, 내 정신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시!
간결하고 단아한 느낌이다.
이 짧은 시 한 편에 인생이 오롯 다 담겨있다.
한 번 읽고 나서도 몇 번 더 시를 되뇌였고, 읽을 수록 마음 가득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차올랐다.
해질녘, 아담한 선운사에 울려퍼지던 은은한 풍경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고즈넉한 절의 모습을 뒤로 한 체 찾아갔던 백수해안도로.
그 어느 한 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탁 트인 서해 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붉은 색 물감들을 아무렇게나 흩뿌려놓은 듯 타들어가던 노을.
바닷가 모래 위에 서 있을 때 온 몸을 날려버릴 듯 파도와 함께 불어오던 세찬 바람, 코 끝에 감도는 비릿하고도 생경한 바다내음….
그 바닷가 어느 장어구이집에 자리하고 앉아, 바다의 모든 풍경과 느낌들을 두 눈과 마음에 차곡차곡 담으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펼쳐진다.
시인도 그 식당 어느 한 켠에서 나처럼 앉아,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인이 노래한 풍천장어집 김씨의 삶을 한껏 상상하며 다시 들여다본다.
살아갈수록 인생이 만만찮음을 느낀다.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나의 직무는 무엇일까를 헤아려본다.
내 인생은 어떻게 그러해야하는지를 곰곰, '풍천장어집 김씨'처럼 나도 한참을 오두마니 앉아 생각에 잠겨본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것!
참으로 지리하고도 지리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일이 가장 기본 중에 기본임을, 자신이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표의 시작임을 조용 되뇌여본다.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지금까지 내 인생이 그렇듯이
그렇게 오두마니 내 직무를 다시 한 번 되짚고,
내게 주어진 날들동안 최선을 다해,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삼십년이고,
우주의 한 귀퉁이를 잘 지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