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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김작가 Aug 21. 2016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43. '정일근'시인의 기다림 미학.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ㅡ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 지성사 2009>







"그러니까…… 당신은 말하자면,  바다 있지, 크으은  바다 말이여…… 넓으은 그런 바다, 그 바다와 같어.  알아들어? …… 

작은 연못도 아니고, 그 조그마한 연못 말고, 강있지 강도 좀 작아서 그것도 말고,…… 바다여 바다. 크으은…….   하 넓다 넓어.  으응.  알것지?……."








그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지.

번화가 끝자락에 자리한 서너 평 될락 말락 한 어느 조그마한 가게. 비를 피하려 건물 모퉁이 한편에 우두커니 서있다 보게 되었지. 그 가게 유리문 너머 의자에 오두마니 앉아 나를 바라보던, 검은 뿔테 안경을 눌러쓰고 희끗 머리카락이 이마를 살짝 가린 한없이 선량해 보이는 눈매를 지닌 그 분과 눈이 마주쳤지. 빙긋. 나는 어색하게 웃었어. 그러다 불현듯 무슨 가게인지 궁금해졌지. 두리번 둘러보니 아.... 그 흔하디 흔한, 살면서 숱하게 그냥 지나치며 눈으로 봐오기만 했던 사주와 타로였어. 의심이 많은 내겐 별 의미없는 곳이지. 늘상 지나치는…. 그런데 그 날 따라 '당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라는 그 홀깃한, 홀깃한 광고 문구가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팔랑거리다 내 두 눈에 쏘옥 박히는 순간. 그때 마침 좀 더 거세게 따라지는 빗발을 피하려 이리저리 몸을 흔들다 같이 흔들려버린 내 마음을 타고 쓰윽. 에라, 모르겠다. 쓰윽. 나는 그 가게의 문고리를 결국 잡아 돌리고 말았지.




그 순간 선량한 눈매가 더없이 깊은 하회탈을 만들면서 나를 반겨주었어. 마치 '내 들어올 줄 알았지!'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어. 그렇게 자석에 이끌리듯 털썩 그분 앞에 앉았지. 순간 무언가 모를 쑥스러움에 난 인사를 한층 더 밝게 해야만 했어. 그런데 뜻밖에도 편안한 목소리로 뭐든 물어보래. 아. . . 이런. 정말 갑작 뭐든 막 물어보고 싶어졌어. 낯설어 아무 생각 없던 내 머릿속이 바빠졌지. 그러다 번쩍 툭! 내 앞으로의 날들이 궁금해졌어. 난 어디로 가고 있나. 잘 가고 있나. 그래 걸어가야 할 앞으로의 길을 물어볼까 하다 엉뚱하게도 튀어나온 말은,

저는 누구인가요.

아… 이 무슨 황당한 질문이야.





나도 잘 모르겠는 나를 그분인들 어찌 알겠어마는.

그래도 난 이미 내뱉었으니 번복하지 않기로 했어. 나의 숫자를 읊었어. 태어난 년도와 태어난 달, 태어난 날짜와 태어난 시간을. 그분은 열심히 받아 적었지. 그리곤 잔뜩 손때 묻은 두꺼운 책자를 이리저리 펼치며 종이에 연신 어려워 보이는 한자들을 휘갈기는 거야. 그렇게 내가 몇 개의 한자로 구체화되는 순간. 아, 심히 두근거렸어.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첫사랑을 재회한다쳐도 이렇게 두근거릴까.







"그러니까…… 당신은 말하자면,  바다 있지, 크으은  바다 말이여…… 넓으은 그런 바다, 그 바다와 같어.  알아들어? …… 작은 연못도 아니고, 그 조그마한 연못 말고, 강 있지 강도 좀 작아서 그것도 말고…… 바다여 바다. 크으은…  하 넓다 넓어. 으응. 알것지?……."





아. . 이. . 무슨. .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 .




정말 뜬금없었어.

바다라니…….




그러니까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에 나는 음의 기운이래. 또 세상을 물과 불로 본다면 나는 물의 기운이 가득 이래.  그 물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 조그마한 연못도 아니고 강도 훌쩍 넘어서고…… 그 넓디 넓으으은 바다, 바다래.  








하아. . . 바다라.

한없이 출렁이는 바다.

고래가 잠들어 있는 바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을 일삼아야 하는 바다. 그 바다 말이지. 그게 나였어. ……








그 바다와 같은 나는 늘 출렁일 수밖에 없음을 거듭 알려주었어.

그래서 가만히 있을 팔자가 아니라나.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림하고 조용히 나무 그늘처럼 가만히 있다 차려주는 밥 먹으며 살고 싶어요 하니,

그럼 다시 태어나란다…….


그래도 내 운명은, 언젠가는 치솟을 고래 한 마리쯤은 , 그 고래가 자유로이 맘껏 뛰놀도록 한없이 놓아주기도 하 출렁이는 거센 파도쯤이야 하는 그런 바다니 뭐든 하고 싶은 것은 맘껏 해 보란다.






그러니 출렁이는 바다인 내 운명을 사랑해야겠어.


그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 지는 고래 한 마리쯤은 품고 있는 내 운명을 말이야.


가끔 심하게 파도치는 내 바다가 싫더라도,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고래가 언젠가는 훤히 모습을 오오래 드러내는 때, 그때가 오면 분명 함박웃음을 웃을 수 있니……. 그러니 때로는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어둠 속에 서서…너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좀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망망대해에서 기다리다 혹 너무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고래에 지치고 외로워 한없이 슬퍼지더라도,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더냐라고 가르쳐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계속 연애를 하듯 때론 좀 뜨겁게 무한애정으로 고래를 기다리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그것 분명,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다림의 미학일 거야.

힘들지라도 기다린다는 것.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말처럼,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행복할 지도 모를' 기다림의 미학

말이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바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 ㅡ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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