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시를 쓴다'는 김선우 시인의 '몸속 잠든 이' 깨우기
시를 짓는다.
시를 받는다.
시와 논다.
시에게 나를 빌려준다.
이런 어감은 결코 아니란다.
'몸속에 잠든 이 누군가'를 지니고 있는 김선우 시인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나는 그냥 시를 쓴다'
나는 그냥 시를 쓴다
'쓴다‘고 말할 때, 시 쓰는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넓고 거친 격랑 속이다. '쓴다'의 거리감 속에는 섣부른 신비가 개입하지 않아서 좋다.
……
그리워하면서 나는 쓴다.
……
시 쓰기는 우리의 쓸쓸함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몸을 바싹 붙이는 일.
몸과 몸의 경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경계를 지우거나 넘어서는 일.
'지금 여기'의 이 아득한 거리감 속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시인들은 시를 어떻게 쓸까?
사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화두다.
정말 시인들은 시를 어떻게 쓸까?
내게 시인이란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속세에 찌든 평범한 나와 같은 이들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 그 자체다. 타고난 독특한 언어적 감수성은 필수요, 날카로운 시선을 옵션으로 한 아웃사이더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예사롭지 않은 포스를 지닌 이들이 내겐 시인이다.
그러니 그런 시인들에게 시란, 모름지기 눈 깜짝할 사이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후두둑, 예기치 않은 어느날 생경한 시어들이 막 쏟아질테고, 그저 그것들을 휙 일필휘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시인의 정의에 무게를 둔 내 생각으론 '시란 받는다' 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듯 했다.
하지만, 김선우 시인은 말한다. '그저 쓴다' 라고.
이 표현은 나의 잘못된 고정 관념을 단박에 깨뜨려 주었다.
담담하게 그저 쓰고 또 쓰고……. 한없는 수련의 과정을 눈 앞에서 보는 듯 하다.
변함없이 묵묵히 쓰는 행위 그 자체는 어찌 보면 하나의 선(禪)이다. 그 과정에서 따라올 삶의 고독과 쓸쓸함, 슬픔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리라. 그러니 이 모든 과정이 녹아든 한 편의 시야말로 인생의 참다운 아름다움이자 녹록지 않은 삶의 응축일 수 밖에.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씌여진, 시들을 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꿀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바람에 출렁이는 밀밭보면 알 수 있네
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되는 바람이
실은 얼마나 여러 갈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배가 떠날 때 어떤 이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뭍을 바라보지
그러니 애인아 울지 말아라
봄처럼 가을꽃도 첫 마음으로 피는 것이니
한 발짝 한 발짝 함부로 딛지나 말아주렴
-- 그러니 애인아 , 늙은 진이의 말품으로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
첫 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
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
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온몸의 불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
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
몸이 물처럼
마음도 그렇게
너의 영혼인 내 몸도 그렇게
--대천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야
김선우 시인의 말대로 시 쓰기는,
한 없는 쓸쓸함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몸을 바싹 붙이는 일이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씌여진 시를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한 없는 쓸쓸함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한발짝 더 마음을 바싹 붙이는 일.
그리하여 많은 말들에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하고, 바싹 마른 일상에 닫힌 내 마음을 깨우는 일. 그렇게 내 몸속에도 깊이 잠든 이를 깨워 가슴 환하게 만드는 일.
그것이 오늘도 내가, 우리가, 씌여진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란, 영혼의 굶주림을 위해 식탁을 차리는 사람이다. ㅡ 김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