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심보선'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 본 슬픔의 일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 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 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슬픔이 없는 15초」
누구나 비밀을 갖고 있잖아요.
시란 그런 비밀과 비밀이 감응하고 만나는 게 아닐까요?
독자도 그렇고 쓰는 사람도 그렇고, 세상에서 보여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
내가 평소에 말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서로 만나는 것 같아요.
시는 이런 비밀들의 나눔, 비밀들의 교류인 셈이죠.
슬픔이 없는 15초(2008)와 눈앞에 없는 사람(2011)의 시인 심보선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경이로운 순간이 많으면 자기연민에 빠져들지 않아요. 낙관에도 빠져들지 않아요.'
살아가다 보면 잠시 모든 걸 멈추게 될 때가 있다. 아니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동작과 생각들을 멈추고 그저 한 순간, 아무것도 아니고 싶을 때가 있다.
감정으로 치자면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
그저 그런 순간이 그리울 때가 가끔 있다.
슬픔이 없는 15초!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 아래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물들 사이로 한껏 타자화된 나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사물들을 지긋이 응시하면서 자잘한 생각들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 바로 그런 순간이 슬픔이 없는 15초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기에 가슴 한편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슬픔이란 것들이 잠시 숨을 죽이는 그런 순간 말이다.
시인의 말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몸이 조용히 늙어가는 일일 것이다.
늙어가는 와중에 비가 새고,
비가 새더라도 돌아서면 한껏 나약한 우리는
늘 사랑을 꿈꾸고,
삶에 대한 슬픔이 솟아오르더라도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는 오후처럼 온 힘을 다해 또 하루를 살아내고,
그리하여 어느 순간, 고요하고 평화로운, 슬픔이 없는 15초를 맞이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또 어느 날 하루쯤은, '휴일의 평화'를 맞이하고 방전된 자신의 기력을 재충전하며,
'오늘 나는'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삶이 아닐까?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시인은 우리에게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 그것들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휴일의 평화」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전에는 평화로웠습니다
조카들은 톰과 제리를 보았습니다
남동생 내외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여동생은 연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조금만 늙으셨습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후 또한 평화롭습니다
둘재 조카가 큰 아빠는 언제 결혼할 거야
묻는 걸 보니 이제 이혼을 아나 봅니다
첫째 조카가 아버지 영정 앞에
말없이 서 있는 걸 보니 이제 죽음을 아나 봅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입니다
아름다운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허공이라면 뛰어내리고 시고
구름이라면 뛰어오르고 싶습니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날은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나는」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