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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 Oct 19. 2021

#04 다시, 올리브

외로움을 견디고 사랑을 하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삶의 이야기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다음에 무슨 책을 읽을까 인터넷 서점을 훑어보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고 너무나 독특해서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호감이 가는 애매한 지인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길에 서서 조금은 어색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도 않은 채로 헤어져놓고는 집에 와서 그 짧은 대화를 오래도록 곱씹게 하는 사람. 올리브 키터리지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2020).

  『올리브 키터리지』 리뷰를 쓸 때, 작가가 책 제목을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의 이름으로 짓는 것에 대한 용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대중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을 책의 표지에 적는 것은 얼마나 대담한 일인지. 『다시, 올리브』는 바로 그 시도가 성공을 거두지 않았으면 절대 나오지 못했을 제목이다. 스트라우트가 자신의 세계에 생명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런 제목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와 크로스비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지 않겠냐고 독자들을 다시 한번 그곳으로 초대한다.

  전작을 이미 다루었기에 후속작인 이 책은 리뷰 대상에서 제외했었다. 다른 점도 분명히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며칠 동안 이 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기어코 글을 들고 오게 되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다양한 키워드를 뽑아내어 생각을 정리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맴도는 이야기들을 추려내어 써보고자 한다.

  지난주 화요일,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아주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는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를 뵙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소식을 들어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바로 며칠 전에 뵈었는데, 다음에 또 오겠다고 약속하고 나왔는데 그리 된 것이었다. 그게 마지막 인사일 줄은 정말 몰랐다. 차를 돌려 다시 내려가서 상을 치르고 왔다. 그리고 그 삼사 일의 시간 동안 이 책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개인 고유의 외로움과 인간 보편의 외로움 속에 사는 사람들, 그러나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다시 사랑하며 그 외로움을 견뎌내는 사람들, 그리고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경험하고 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을 겪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함께 죽음과 생명이 생생히 공존하는 공간에서 사흘을 보내며 『다시, 올리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전작 『올리브 키터리지』와 마찬가지로, 『다시, 올리브』 또한 크로스비 마을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연작 형식으로 풀어낸다. 조금은 무뚝뚝하고 괴팍하지만 특유의 온정을 지니고 있는 올리브의 시선을 경험하기도 하고, 조연으로 등장할 뿐인 올리브를 다른 이의 눈을 통해 보기도 한다. 너무나 평범해서 익숙하지만, 그래서 숨기고 싶기도 한 일상의 구석구석을 적나라하지만 따스하게 그려낸다. 행복보다는 슬픔이나 우울함, 분노, 외로움을 더 쉽게, 자주 경험하게 된다는 우리 삶의 쓸쓸한 진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올리브 키터리지』와 『다시, 올리브』 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전작과 비교해서도 유난히 사랑이 크게 자리한 느낌이다. 인물들이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듯도 하고, 그 사랑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사랑은 복잡다단한 감정 아니던가. 이야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나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을 납득할 수 있었다.

올리브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은 자신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얼마나 변치 않을 수 있고, 그 사랑은 얼마나 깊을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사랑이—그녀 자신의 경우처럼—일시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419-20)

아주 다양한 범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단순히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이 아닌, 그보다 더 넓은 의미의 사랑.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무심코 지나치기도 하는 순간적인 강렬한 감정까지도.

베티가 가슴속에 제리 스카일러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올리브는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랑은, 자신이 의사에 대해 품었던 그 짧은 사랑을 포함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베티는 이 사랑을 오래오래 심장 가까이 품고 있었다. 그 사랑이 그만큼 필요했던 것이다. (421)

  아무리 짧고 의아해 보이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사랑이라고 느꼈다면 그것은 사랑이며 진지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스트라우트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 사랑이 '필요'했다는 말도 흥미롭다. 일방적이고 남이 보기에는 허무맹랑한 사랑이어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슴에 품는 그 행위 자체가 주는 힘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랑이 쌍방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표현되어야 하는 것도, 어떠한 관계로 이어져야 하는 것도, 장기간 지속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형태, 빛깔, 질감, 기한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지탄받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형태일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는, 그런 것일 뿐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고, 가슴속에 자리 잡고, 변하거나 끝나기도 한다.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배신과 증오로 이어지기도 하며 고독으로 끝나기도 한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지했든 하지 못 했든, 사랑이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영국의 콘월주에 위치한 항구. 메인주 크로스비를 떠올리면 초봄, 쌀쌀한 공기가 맴도는 바닷가가 떠오른다.

  사랑과 함께 이 소설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또 다른 감정은 외로움이다. 소설 속 모든 인물이 외로움을 호소한다. 부모나 자식, 배우자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아서, 이전에 살았던 곳이 그리워서, 또는 믿어왔던 것이 무너져서. 제각기 사연은 다 다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두가 외롭다는 점이다. 같은 크기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사랑의 기간을 맞추는 것도 어려우며, 때로는 상황이, 또는 표현의 방식이 사랑이 전달되는 것을 방해한다. 사랑은 아주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따라서 외로움도 그렇다. 사랑하고 사랑받는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외로움도 존재한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 사는 동안 우리는 무수히 사랑을 하지만, 결국에는 각자의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주된 감정이 더 두드러지는 이유는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바로 이 죽음 때문이다. 죽음은 다양한 형태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상실의 기억으로 한 사람의 일부로 자리잡기도 하고, 우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기도 하며, 엄습해오는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앗아가거나 나라는 존재 자체의 끝을 의미하는 죽음은 인간 삶에서 가장 큰 재앙처럼 느껴진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온다. 조금 빠르거나 늦거나, 조금 더 예상 가능했거나 그렇지 못했거나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평소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타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그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한다.

올리브는 두 남편을 먼저 보냈음에도 이제야 그것이 자신에게도 닥친 일임을 깨달았다. 그녀도 죽을 것이다. 그것이 특별하고 놀랍게 느껴졌다. 전에는 그것을 정말로 믿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끝이 다가왔다. 마침내 그녀의 삶에도. 그것은 그녀의 뒤에서 정어리 어망처럼 점점 커졌다. 그 어망에는 온갖 종류의 무익한 잡초와 부서진 조개껍데기와 작고 반짝이는 물고기(...)가 담겨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라지려고 했다. (458)

  올리브는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노쇠해져 전에는 대수롭지 않았던 일들도 사력을 다해야만 겨우 해낼 수 있다는 것,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것,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임을 몸소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적이기만 한가?

책의 커버를 벗겨보면 표지는 생명감이 넘치는 초록빛이다.
"나이가 들면," 종업원 여자가 가고 나서 올리브가 앤드리아에게 말했다. "투명인간이 돼.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자유를 주지." (324)

  나이가 들수록 못 하는 일이 많아진다. 쓸쓸해진다. 그러나 거기서 오는 자유도 있다.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사회적 시선이나 명예 따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고,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는 그저 그런 늙은이가 된다는 것은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도 된다. 

  나이 듦과는 별개로,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에야 보이는 것들도 있다. 투병 중인 신디가 2월의 햇빛을 사랑하듯이. 황량한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생명을 약속하는 2월의 햇빛, 올리브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바라본 "새로 맺은 싱싱한 봉오리의 모습"(459). 삶의 빛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빛이 약해지면서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아직 날이 춥던 봄날, 새로 피어난 꽃 위로 쏟아지던 햇빛.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의 아름다움에 행복해할 수 있는 것,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것(459).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로 나는 단 한 가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460). 이것만큼 자유를 주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필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였을 때에야 얻는 평화와 자유, 행복이 있지 않을까.


 이른 아침, 혼자 빈소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문득 이 책이 떠오른 이유가 뭘까, 며칠 내내 생각했다. 처음에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된듯한 묘한 적막감과 죽은 이를 위해 피워놓은 향 내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움과 죽음이 가득한 이야기니까. 그러나 단지 그 순간 그 쓸쓸한 공간에 혼자 있었기 때문에 느낀 적막감 때문이었을까?

  할머니께 인생에서 최우선시해야 할 단 하나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여쭤보았다면, 아마 '사랑'이라고 답하셨을 것이다. 늘 사랑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도 사랑을 많이 베푸셨다. 돌이켜보면 이토록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유는 사랑하라는 할머니의 말씀과 소설의 메시지가 겹쳐 들렸기 때문이고, 죽음이 단지 비극적인 끝이 아니라 자유와 평안이기도 하다는 올리브의 깨달음이 할머니께도 가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삶과 스트라우트가 우리에게 들려준 올리브 키터리지의 생애를 떠올리며, 죽음과 마찬가지로 행복 또한 멀리 있지 않고 나는 언제나 외롭겠지만 또 항상 사랑하며 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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