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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 Jul 05. 2021

#02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하루를 살아냈다."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인물의 이름으로 짓는 일은 꽤 대담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대중에게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 창작된 인물의 이름이라면 더더욱. 책을 펼쳐서 읽기 전 독자는 책의 제목에서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 소설에 제목의 인물이 등장할 것이고, 아마 그 인물이 주인공일 것이라는 어렴풋한 예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책 외에도 놀 거리와 볼거리로 넘쳐나는 시대에, 아니, 오히려 책을 꾸준히 소비하고 읽는 사람이 소수인 시대에, 첫눈에 독자의 흥미를 끌기 어렵다는 점을 알면서도 이야기에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이는 자신감과 용감함에 감탄한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만약 지인들과 함께 하던 독서 스터디에서 이 책이 선정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이 책을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책의 제목에도, 온라인 서점의 책 소개글에도 크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했던 글과 맛과 향과 음악, 영화와 그림과 사람을 만나게 해 준, 내 세상을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들어준 고마운 언니가 고른 책이었기에 믿음을 가지고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권상미 옮김, 문학동네(2010).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사서 읽던 당시에 나는 논문에 한창 치이고 있었고, 결국 스터디 당일까지 앞의 몇 챕터만을 간신히 읽어 가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듣기만 했다. 그러고는 완전히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방전된 이북리더기를 충전하여 이 책을 열어보았고, 앞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첫 챕터부터 다시 읽어나가며 왜 이전에 이 책이 조금 버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깨달았다. 항상 공부에 쫓기는듯한 불안한 내 감정상태도 물론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소설의 앞부분을 읽으며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은 올리브 키터리지인데, 책은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책은 미국 메인 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를 배경으로 한 열세 편의 단편을 엮은 연작소설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어떤 이야기에서는 중심이 되었다가 어떤 이야기에서는 배경으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마치 카메라의 초점이 옮겨가듯이. 제목만 보아서는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의 일생을 시간순으로 따라갈 것만 같았는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독자들에게 그의 이런저런 면모를 여러 편의 글에 걸쳐 조각조각 비춰준다. 독자들은 그가 주인공인 단편들과 그의 주변 인물을 다루는 단편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파편들을 주워 모아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여성을 스스로 그려내야만 한다. 체구가 크고 퉁명스러우며 변덕스럽고 직설적이라는 일관된 묘사, 그러나 타인의 이야기에 불쑥 등장하여 예상치 못한 이면을 보여주는 그. 독자들은 강인해 보이기만 하던 그의 연약한 속내를 보기도 하고 투박한 그의 직선적인 친절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퍼즐을 완성해나가듯, 올리브 키터리지를 알아간다.


  이야기에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소설 속 인물들은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기도 하고, 불륜을 하기도 하며 술주정뱅이일 때도 있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지만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살인자인 아들을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한다. 물건을 훔치고 마약을 한다. 내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살면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당장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을까? 나는 이 인물들과 닮은 면이 없을까?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비난을 피할 수 있는 소설 속 인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실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바로 그 지점이 마침내 내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 이 소설의 매력이다. 아주 인간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라는 점. 어느 순간부터 소설 속 인물들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대체로 친절하지만 아주 잔인해지기도 하고 나약해 보이지만 의외로 꼿꼿한 사람들, 모순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실수하고 인생의 기로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 그럼에도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나와 나의 가족,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 싫어하는 사람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거기 담겨있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 중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모두가 불행한 일을 겪고 삶의 비참함에 빠진다. 젊은이들은 젊어서 방황한다. 부모의 기대, 공동체의 요구, 사회의 압박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비틀댄다. 나이 든 이들은 살아온 세월의 무게, 끝까지 묻어두지 못한 과거의 그림자, 색이 바래버린 주변 풍경에 피로와 회환에 잠긴다. 그러나 각자의 사정으로 각자 힘겹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의 모음을 읽고 난 후 남는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따스함이다. 해피엔딩이라고 불릴 만한 결말을 맞은 인물이 거의 없는데도.

  스트라우트는 갈등과 배신, 후회와 불안 속에 꾸준히 사랑을 그려낸다. 토니 모리슨이 『러브』의 서문에 쓴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People tell me that I am always writing about love. Always, always love. I nod, yes, but it isn't true—not exactly. In fact, I am always writing about betrayal. Love is the weather. Betrayal is the lightning that cleaves and reveals  it" (ⅹ). 아마추어의 솜씨로 서투르게나마 직역해보자면 이런 의미다. "사람들은 나에게, 내가 언제나 사랑에 대해 쓴다고 말한다. 언제나, 언제나 사랑에 대해서. 나는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말이다. 사실, 나는 언제나 배신에 대해 쓰고 있다. 사랑이 폭퐁우라면, 배신은 그 폭퐁우를 가르며 그를 밝혀 보이는 번갯불이다." 『올리브 키터리지』 또한 사랑 때문에 배신당하고 고통받고 엉망진창이 되어도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또는 다른 사람을 새로이 사랑해서 희망의 불씨를 되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나 행복과 따뜻함, 다정함만으로 가득하지 않다는 걸, 사랑해서 오히려 더 아프고 비참할 때도 많다는 걸 우리는 외면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트라우트는 장밋빛 로맨스를 그려내지 않는다. 우리를 달콤한 환상 속으로 인도하여 현실을 가리는 대신, 인간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적나라하지만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의 본질을 포착한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151)

  아주 사소하지만 즉각적이고 소중한 작은 기쁨들. "창이 너무 높아 해안선은 전혀 보이지 않고, 눈이 닿는 곳엔 잿빛 바닷물과 하늘뿐"(399) 일 때도, 도무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한 점도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이 작은 기쁨들로 나아간다. 끔찍한 상황에서도 타인의 대수롭지 않은 손길 한 번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결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불행하지만은 않다. 꽃을 가꾸고, 무뚝뚝한 친절을 베풀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정과 사랑을 찾는다. 그렇게 슬퍼하고 기뻐하고 따분해하고 당혹스러워하면서, 나이가 들어도 삶은 이어진다는 것을 스트라우트는 올리브를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매일을 같은 듯 다르게 보낸다. "다시 하루를 살아냈다" (428). 이 짧은 문장을 읽었을 때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하루를 살아냈다는 것 자체를 기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잠자리에 누웠을 때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았다고 홀가분하게 잠에 들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될 것인가. 기쁨으로 충만한 하루보다 고통과 실망으로, 피로와 슬픔으로 기억되는 하루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되뇌어본다. 그래도, 다시 하루를 살아냈다고. 그것만으로 의미 있다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환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 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614)

  잿빛으로 가득한 풍경만을 계속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기적적으로 세상을 오색찬란하게 물들여주진 않겠지만, 빽빽하게 머리 위를 뒤덮은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가는 한 줄기 빛을 알아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잿빛이라고만 생각했던 풍경에서 새로운 윤곽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본다. 이 책은 그렇게 얘기해준다. 그래, 세상과 삶은 아름답지 않아. 그래도 매일을 살아갈 가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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