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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 Sep 27. 2021

#03 토성의 고리

부서진 파편들을 애도하는 비가, 그러나 슬픔을 노래하는 것에서 그치는가

  이 책을 아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 독서기록장을 확인해보니 7월 5일에 읽기 시작하여 27일에 완독 했다. 읽는 데에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는데 또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스스로가 어느 정도 만족스러울 만큼 의미를 꼭꼭 씹어 삼켰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그리고 소화한 내용을 다듬어서 글로 풀어내기까지 무려 세 달이 걸린 셈이다. 물론 그 시간 동안 이 책에만 매달려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글을 마감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와 같은 느낌으로 머릿속 어느 한구석을 내내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기까지 세 달이 걸렸다고 하는 게 맞겠다.

W.G. 제발트,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2019).

  유달리 시간이 오래 걸린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한가로이 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항상 책상 앞에 앉아 책에 줄을 긋고 메모지를 덕지덕지 붙이고 독서기록장에 메모를 해야만 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또 그래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소설이었다. 도대체 이 내용에 대해 어떻게 정리된 한 편의 글을 쓸 것인가, 문학을 공부하던 나의 강박을 자극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드디어 이 '어려운' 책에 대한 글을 '쉽게' 쓰자는 결심이 서 지금 타자를 치고 있다. 

  구체적인 감상을 쓰기에 앞서 어떤 소설이 '쉽다'거나 '어렵다'라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개입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밝힌다. 그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지자면 나는 어려운 글보다는 쉬운 글을 일반적으로 더 선호한다. 공부를 하면서 이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어려운 글을 많이 접하다 보니 쉽지만 명확하게 뜻을 전달하는 글을 선호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아하게 되고야 마는 어려운 글도 있기 마련인데,『토성의 고리』도 그중 하나였다. 제발트의 다른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않아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 애정을 느끼게 된 이유가 지극히 사적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올라온 모든 글이 그랬지만, 이 글은 그래서 특히나 매우 주관적이라고 미리 변명해둔다.  

  인터넷 서점 구매내역을 뒤져보니 이 책을 2020년 5월에 샀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되었던, 내 인생을 여러 방향으로 넓혀준 친한 언니가 추천해주어 장바구니에 담았던 책이다. 그러니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추천받았던 것은 그보다도 훨씬 전이다. 내가 아직 자취를 하고 있던 시절 언니 집에 놀러 갔을 때 맨 앞의 몇 장을 읽어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몇 페이지만 빠르게 훑고 덮어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문장들이 내 마음을 겉도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이 책을 정말로 읽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았다.

  내 머릿속 '언젠가는 읽어보아야 할 책' 리스트의 끄트머리 어딘가에,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 그리고 내 책장에 이 책은 아주 오래 있었다. 여러 이유로 우선순위가 높은 다른 일들과 책들에 밀려 띠지조차 빳빳한 채로. 그러다 휴식의 필요성을 깨닫고 올해 중순 몇 년 내내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자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책들은 읽는 때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래서 인생의 어느 특정 시점에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에게는 『토성의 고리』가 그런 책이었다. 딱 지금 읽었기 때문에 이토록 내 마음에 큰 반향을 가져올 수 있었던 책. 신기한 일이다. 활자를 읽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시기에 술술 읽히지도 않는 이 책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는 사실이.

  화자는 1992년 영국 동부의 써퍽주로 도보여행을 떠나고, 도보여행을 다녀오고 1년 후 온몸이 마비되어 노리치의 병원에 입원한다. 이야기는 입원해 누워있는 화자의 생각에서 출발하여, 시간을 거슬러 그가 다녀온 도보여행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화자는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 목격한 광경들, 지나간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주로 그러한 마주침에서 비롯된 화자의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름도, 나이도, 외모도, 그 무엇도 밝혀지지 않은 화자는 도보여행의 경험을 통해 인류와 인류의 역사에 대해 느낀 바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토성의 고리』를 펼치면 이 사진과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된다.

본문 11페이지에 실린 사진.

  온몸이 마비된 채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화자가 볼 수 있었던 창문 밖의 하늘 한 조각.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층 병실에 입원하자마자 나는 그 전해 여름에 걸어다녔던 드넓은 써퍽 지역이 이제 눈과 귀가 먼 단 하나의 점으로 쪼그라들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실제로 내가 침대에 누워 볼 수 있던 세상이라고는 창틀 안에 갇힌 무채색의 하늘조각이 전부였다.
  그날, 현실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나는 별스럽게 검은색 그물망이 쳐진 병원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서라도 현실을 되찾아야겠다는 소망을 여러번 느꼈다. (10-11)

  나를 이 책으로 끌어들인 구절이 바로 이것이었다. 온몸이 마비된 경험이 없으니 화자와 완전히 같은 상황에 처한 적이 없는데도, 이 첫 장을 읽는데 깊은 공감이 밀려왔다. 오래전, 언니의 집에서 읽었을 때에는 조금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친밀하게 와닿았다. 저 사진조차 마친 내가 찍은 것처럼 익숙했다.

무기력함으로 마비되어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누워 바라보던 창문 밖 세상.

  신체적으로 마비된 적은 없지만, 굳어버린 느낌이 무엇인지 안다.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하고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고, 침대에 무기력하게 갇혀 창 밖으로 보이는 한 조각 하늘만을 하루 종일 쳐다보다 몸을 뒤척이는 날들. 나는 정확히 화자와 같은 심정으로 이 사진들을 찍었다. 그리고 화자처럼, 어느 날 나는 밖을 제대로 보고 싶어졌고, 밖으로 나오고 싶어졌고, 그 얼얼하고 둔감한 감정적 마비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래서 이렇게나 다르게 읽히는 것일 테다.

  한 장을 더 넘기자 나는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라뮈 연구에 몰두했던 마이클 파킨스와, "평생 동안 일체의 지적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결코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항상 미심쩍은 세밀한 부분에서 시작하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대한 일종의 사적 학문을 전개"한, 귀스따브 플로베르 연구에 인생을 바친 재닌 로절린드 데이킨스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14-5). 이것은 아주 사적인 애정이다. 내가 동경해왔고 한때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다. 어수룩하고 어딘가 엉망진창일지라도, 자신의 학문에 몰두하며 실용성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도 인류의 정신적 밑거름이 될만한 것들을 꾸준히 가꾸는 사람들. 문학을 공부했고 문학과 삶을 함께하고 싶어 하는 내가 어찌 이런 사람들을 애정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발트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읽은 『토성의 고리』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당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소설 내내, 그는 끝없이 소멸, 고통, 재앙, 공허함, 쓸쓸함, 하강, 파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써퍽주를 여행하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화자는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된 것들을 본다. 인류의 역사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쓴다.

새롭게 생겨나는 형태에는 이미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전 세계의 역사는 갈수록 확장되면서 멋지게 비상하는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오선에 도달한 뒤 암흑으로 하강하는 궤도를 그린다. (34)

  사람들은 인류가 진보해왔다고 믿고 싶어 한다. 산업화를 통해, 과학 기술 발전을 통해, 시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그러나 제발트는 그 모든 '발전'의 이면에 전쟁과 제국주의, 억압과 착취, 환경 파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써퍽주를 여행하면서 화자는 끊임없이 그 잔해를 발견한다.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던 워털루의 기념관, 한때는 부유하고 찬란한 항구 도시였지만 대자연의 침식을 피하지 못해 황폐해진 더니치, 인간의 미감과 유희를 위해 온통 헤집어진 땅과 마구잡이로 옮겨졌다가 병에 걸려 죽어간 나무들. 가는 곳마다 그는 파괴의 흔적을 보고 그 흔적에서 약자에게 가해진 폭력을 본다. 

  그러나 『토성의 고리』가 내게 남긴 것은 비관적인 공허감이 아니었다. 거기서 끝나는 소설이었다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희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므로. 그 빛이 아주 미약해서 알아보기 힘들지라도. 제발트가 이런 낙관적인 읽기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손을 떠난 이야기는 독자의 안에서 완성되는 법이니, 나는 멋대로 희망의 빛을 찾아내었다.

   여행을 하며 화자가 마주치는 광경은 파괴의 잔해들이다. 그러나 화자가 그 과정에서 직접, 또는 기록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착취적인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조셉 콘라드와 로저 케이스먼트, "날이 갈수록 무도해지는 대지의 착취와 점점 더 의문스러운 수단을 통해 추구되는 사유재산의 축적, 그리고 점점 더 가차없어지는 공동체 권리의 제한 등을 보며 역겨움을"(238) 느낀 작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아주 정교한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을 만드는 알렉 개러드 등. 이들은 거대한 파괴의 조류를 막지는 못했으나, 막으려는 시도를 했거나 적어도 파괴에 가담하지는 않은 인물들이다. 실용성이나 출세, 성공, 부의 축적과 같은, 인류가 갈수록 숭배하게 된 가치를 좇지 않는 사람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불가항력적인 끌림을 느꼈다. 앞서 언급한 마이클 파킨스와 재닌 로절린드 데이킨스처럼, 남들이 보기에 이들은 무용한 일에 인생을 바치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직업적 전망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이런 돈 끼호떼와 같은 열정"(155)으로 가득 찬 사람이거나, "몇날 몇주 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짜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213)는 사람이거나, "여러해에 걸쳐 줄곧 망상에 빠져 난방도 되지 않는 헛간에서 일체의 정상적인 기준을 벗어나는, 필경 의미도 목적도 없는 공작놀음에 몰두하는 사람"(286)인 것이다. 화자조차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에 개의치 않고 내 시골 별장의 고요한 여유 속에서 토머스 브라운의 『유골단지』를 께베도풍으로 조심스럽게 번역하는 데 계속 골몰할 것이다(그러나 이 번역을 출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89)

  출판하지도 않을 작업에 매달리는 화자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쓸모없다는 사회의 조롱 어린 시선에도 꿋꿋이 자신의 연구를 해나가고, 또 그것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록'을 한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록한다. 논문을 쓰고,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책을 쓴다. 이러한 기록들은 희망의 증거이다. 모두가 인류의 파괴적인 행위에 동참한 것은 아니며,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작가 제발트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욕으로 인류가 저지른 일들, 그로 인해 파괴된 것들, 고통받은 사람들, 그리고 그런 폭력적인 주류와 정상성에서 벗어난 삶을 살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들에 대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과 창조해낸 허구를 섞어 구태여 장편의 글을 써내어 출판하지 않았는가. 그는(정확히는 이 책의 화자는) 우리 문명이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 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99-200)고 했지만, 이 소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결코 낙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이렇게 낙관의 가능성을 보았다.

띠지 아래에 숨어있는 토성의 이미지.

  소설을 끝까지 읽고, 책을 덮고 나서야 '토성의 고리'가 무슨 뜻일까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책을 맨 앞장부터 다시 천천히 넘겨보니, 차례 전 페이지에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인용구가 쓰여있었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5)

한때는 토성의 달이었지만 토성에 너무 가까워져서 파괴된 것들의 파편들. 태양에 너무 가까워져서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루스의 이야기가 연상된다. 그렇다면 이 제목은 인간의 오만과 그로 인한 파멸만을 뜻하는 것일까? '토성'과 '달'이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태양에 너무 가까워지려 한 죄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카루스와 토성에 너무 가까워져 파괴된 달을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비록 달은 파괴되었지만 그 파편들은 사라지지 않고 토성을 맴돌고 있다. 화자가 써퍽주를 도보로 여행하면서 목격한 파괴의 현장들, 인류의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착취적인 역사의 흔적들이 이 파편들이다. 그러나 이 파편들은 여전히 토성 주위를 공전하며, 모여서 무엇인가를, 토성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 가능하며,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화자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더 넓게는 인류가 이 파편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여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일말의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 

  선뜻 누군가에게 추천하기는 힘든 책이다. 엄밀히 말해 재밌는 소설은 아니고 쉽지도 않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끌린다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미래에 어느 날 온몸이 마비된 채 병실 창문 밖 하늘 한 조각을 응시하는 화자가 생각난다면, 그런 그가 머릿속으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 글이 문득 떠오른다면 그때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게 다가와 도움이 된 이 책이, 이 글을 읽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탈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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