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n Oct 24. 2021

#07 탄제린

탕헤르, 흥미진진한, 그러나 두려움과 소외뿐인.

  추천을 받아 큰 기대 없이 킬링타임용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탄제린』이라는 제목에서 특별히 끌림을 느끼지도 못 했고, 처음 몇십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남편에게 억압당하는 똑똑한 여자, 그리고 그에 맞서는 여자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가부장적이고 낡은 가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보다야 반가운 주제였지만, 더 이상 새롭다고는 할 수 없는 서사였다. 그러다 무심코 책의 뒤표지에 쓰인 문구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스릴러'라고 칭하고 있었다. 스릴러라고?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남은 소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책에 빠져들었다. 

크리스틴 맹건, 『탄제린』, 이진 옮김, 문학동네(2020).

  작가는 이 소설을 '스릴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지만,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릴러라고 부르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아주 간단히만 요약하면 별로 흥미롭지 않은 소설처럼 보인다. 대학시절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앨리스와 루시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멀어지고, 앨리스는 존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탕헤르로 이사한다. 탕헤르에서 썩 행복하지는 못한, 그러나 나름대로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앨리스의 문간에 갑자기 루시가 나타나고, 루시의 등장 이후 앨리스의 삶에 큰 균열이 생긴다. 하지만 이런 요약으로는 이 소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평이해 보이는 줄거리 이면에 숨어있는 진짜 서사를 엿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우정'과 '탕헤르', 그리고 '루시'라는 단어에 아주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 이 책에 흥미가 생긴 분이 계시다면 책을 직접 읽고 와서 리뷰를 마저 보기를 권한다. 사람들이 '스릴러'라고까지 느낄 만큼 긴장감이 넘치는 이야기를 스포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탄제린』 속 탕헤르는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는, 붉은 색채의 도시라고 느꼈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탕헤르라는 도시에 대한 묘사였다. 이야기 속 모든 공간적 배경이 각각 뚜렷한 이미지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부각되는 곳은 탕헤르이다. 표면적으로는 앨리스와 루시, 그리고 존의 삼각관계, 또는 앨리스와 루시, 존, 그리고 그의 외도 상대인 사빈 사이의 사각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앨리스와 루시, 존, 그리고 탕헤르 간의 사각관계이다. 탕헤르는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탕헤르에 대한 묘사가 어찌나 강렬한지 나는 작가가 언젠가 방문한 탕헤르에 어지간히 깊은 감명을 받았나 보다 하고 어렴풋이 추측했는데, 이 글을 준비하면서 맹건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내가 느낀 바가 맞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2015년 봄 탕헤르에 처음 방문했을 때 완전히 그 도시에 매료되었고, 그래서 소설 속에서 탕헤르가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강한 존재감을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탄제린』에서 묘사되는 탕헤르는 혼란스럽고 시끄럽지만 변화무쌍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이다.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듯이 실제로도 매우 복잡한 역사를 거쳐온 도시이고, 그래서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선 팅기스가 있고, 그다음은 팅기, 티트램, 탕헤르, 탠저스, 탠지어. 누구한테 물어보느냐에 따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154). 탕헤르는 페니키아의 항구였다가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고, 반달족, 비잔틴 제국, 아랍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1956년 모로코의 독립과 함께 모로코에 반환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바로 그 1956년, 모로코의 독립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시기의 탕헤르에서 벌어진다. 모로코인과 유럽인, 유대인들이 섞여 살고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독립을 코앞에 둔 거대한 항구도시. 그 도시의 소란스러운 술렁임과 어지러울 정도로 쨍한 생명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돌아가며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이자 가장 주요한 두 주인공인 앨리스와 루시는 각각 탕헤르를 이렇게 묘사한다.

탕헤르는 누구나 와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결코. 나는 이곳이 일종의 과정이고 시험이며, 심지어 오직 용기 있는 자들만 살아남는 일종의 입회식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국민들과 시민들에게 저항 정신을 불어넣는 곳이고 그것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적응하고, 몸부림치고, 투쟁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의 여자를 보았다. 이곳은 루시 같은 여자를 위한 곳이었다. (105)

탕헤르라는 도시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앨리스와는 달리, 루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탕헤르가 존재한 이래 끊임없이 정복을 당했고, 그래서 늘 새로운 문화를 흡수했으며, 결국 탕헤르는 수세기 동안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과 사물의 축적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탕헤르가 여러 면에서 일종의 유령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죽고 텅 비어 있고 황량한 대신, 이곳은 살아 있었다. 이 도시에서 골목들을 거닐고 생각에 잠기고 차를 마시고 영감을 얻었던 위대한 지성들에 대한 추억과 함께, 이 도시는 번영하고 폭발하고 있었다. 탕헤르는 앞서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증언이며 묘지였다. 그러나 끝난 것 같은, 수명을 다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여전히 휘몰아치고 번창하고 발견되고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내가 평생 탕헤르에 오기를 기다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내가 했던 모든 일,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140-1)

두 사람이 탕헤르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앨리스가 탕헤르에 살고 있는 거주민이고 루시가 여행객인데, 앨리스는 탕헤르에 섞여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루시는 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적응한다. 그러나 이 차이는 단지 탕헤르의 기온이나 문화, 음식 등과 더 잘 맞느냐 따위에서 오는 게 아니다. 탕헤르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상반된 태도가 의미하는 바를 들여다보기 전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들의 특성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앨리스와 루시의 과거 회상 속 베닝턴 대학, 뉴욕과 현재 시점의 배경이 되는 탕헤르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띤다.

『탄제린』은 기본적으로 앨리스와 루시가 돌아가며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다양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등장하는데, 공간적 배경에 더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루시와 앨리스가 함께 다닌 미국 버몬트주의 베닝턴 대학, 앨리스와 헤어지고 탕헤르에 오기 전 루시가 잠깐 살았던 뉴욕이 대표적으로 탕헤르와 대조되는 공간들이다. 탕헤르가 붉은 열기로 이글거리는 도시라면, 베닝턴 대학 캠퍼스와 뉴욕은 싸늘하고 축축한 느낌이다. "뉴욕, 머리 위로 번져오는 또 한 번의 칙칙한 잿빛 겨울, 도시 곳곳에서 내가 묵었던 다양한 하숙집의 비좁은 방들, 여자들 수십 명의 목소리, 복도를 오가는 구두굽소리의 기억. 그리고 그 냄새의 기억"(33-4). 또는, "캠퍼스 중심부를 막 벗어난 곳에 자리잡은 제닝스홀"(…)"이 대학에 깃든 고딕 전설을 형상화한 곳 같았다. 기묘한 발소리, 유령들의 목소리, 정체불명의 이상한 소음들" (78). 맹건은 탕헤르 뿐 아니라 소설 속의 모든 공간의 분위기, 온도, 냄새, 소리 등을 공들여 만들어낸다. 탕헤르의 전통시장 메디나와 재즈바 딘스, 도시의 명물인 뜨거운 민트티를 파는 카페 팅기스와 하파, 앨리스와 존의 집, 과거 루시와 앨리스가 다녔던 베닝턴 대학에 있는 제닝스홀, 그들의 기숙사 방, 루시가 머물던 뉴욕, 등. 모든 공간은 각각의 의미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같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인물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기억되거나 받아들여진다는 면에서 이 소설은 공간적 배경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탕헤르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탕헤르는 인물들의 삶의 터전으로, 그들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지리적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다른 공간들과는 달리 수동적인 뒷배경만으로 남지 않는다. 탕헤르는 거의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인 것처럼 능동적으로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며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정체성과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앨리스와 루시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다. 앨리스에게 독립 직전의 탕헤르는 그가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는 도시라기보다는 끊임없이 행동하고 나설 것을 요구하는 시험이다. 도시가 수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도시의 거주자도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공격적으로 뻗쳐오는 도시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평안과 안정을 필요로 하는 앨리스에게는 버거운 곳이다. 앨리스는 탕헤르가 루시를 위한 도시라고 생각하고, 루시 또한 탕헤르에 강한 끌림을 느낀다. 루시는 평생 가지고 싶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루시는 거의 탕헤르에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사람과 사물, 문화가 거쳐가며 빼곡히 비석을 남긴,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 같은 도시에 루시는 매료된다.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소설의 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앨리스와 루시의 관계이다. 그들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둘은 아주 절친했지만 소원해진 대학 친구이다. 그 관계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름표를 굳이 붙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루시와 앨리스가 서로에 대해 하는 생각의 아주 일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과 몇 주 만에 앨리스와 내가 구축한 관계, 우리가 서로에 대해 느낀 격한 편애는 이성적인 설명을 뛰어넘는 것이었다"(28). "루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평범한 우정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어떤 것, 나를 압도할까 봐, 어쩌면 나를 파괴할까 봐 두려운 어떤 것. 때로는 그녀를 원한다기보다는 그녀처럼 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118). 두 사람은 이 우정이 평범하지 않고 어딘가 과한 면이 있으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 관계를 퀴어적이라고 보았다. 『언니밖에 없네』를 다룬 글에서 이미 말했듯이, '퀴어'를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서로를 갈망하다 못해 아예 서로가 되고 싶은, 너무나 사랑해서 미워하기도 하는 동성 간의 관계는 '정상'적인 친구의 모습은 아니다. 앨리스와 루시의 상대방을 향한 갈망이 로맨틱/섹슈얼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 관계는 여전히 퀴어적이다. 그들의 갈망과 욕망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며, 비정상적이고 어쩌면 병적으라고까지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앨리스와 루시와 존의 삼각관계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독특한 관계성 때문이다. 앨리스와 존은 법적으로 맺어진 이성 부부이기 때문에 가부장적 사회 정상성에 부합하는 관계이고, 이제는 멀어진 동성친구일 뿐인 루시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어야 한다. 헤테로중심적 사회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루시가 나타난 순간부터 앨리스의 삶뿐 아니라 앨리스와 존 사이에도 균열이 생긴다. 루시의 개입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표면적으로 이 개입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억압 아래 살고 있는 수동적 아내 앨리스를 루시가 구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적 권력에 의해 고통받는 여성을 같은 여성이 돕는 이야기, 억압자에 맞서 피억압자끼리 연대하는 이야기. 그러나 실상은 앨리스를 사이에 둔 존과 루시의 경쟁에 가깝다. 이 구도와 경쟁 과정에서 억압과 피억압이 얼마나 복잡하게 작용하는지도 드러난다.

  젠더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존은 명백히 권력자이며 억압자이다. 앨리스와 루시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앨리스는 루시에게 대학을 다닌 것을 후회한다며 한탄한다..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가서 그들과, 그러니까 남자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을 거라고 느끼게 만들었잖아. 하지만 그건 전부 거짓이었어, 그렇지 않니?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우리는 일종의 직업의식을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가식 속에서 학교를 졸업한 거였어. 결혼하면 시간을 보낼 취미생활 정도를 준비했다고나 할까. 덕분에 모든 게 훨씬 더 힘들어졌잖아"(175). 그들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들이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존은 루시에게 대놓고 빈정 거리기도 한다. "당신도 그런 여자들 중 한 명이군요.(…)주방을 박차고 나가자느니, 뭐 그런 거요"(53-4). 

  그러나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축에는 젠더만 있는 게 아니다. 인종이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국적, 계급, 장애여부, 나이 등 다양한 정체성이 모여 한 사람을 이룬다. 루시와 앨리스는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소수자의 위치에 있지만, 계급적 측면에서 보면 존과 앨리스가 특권계층, 루시가 소수자이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이 만나는 곳이 다름 아닌 탕헤르이기 때문에 다양한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루시와, 루시가 탕헤르에서 새로이 만난 현지인 유세프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 두 사람 다 경계의 바깥에 있었다. 나는 출생으로 인해, 유세프는 환경으로 인해. 앨리스와 나누었던 친밀감처럼 강렬한 감정은 아닐지라도, 나는 우리 사이에 최소한 어떤 공감대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우리의 타자성이,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도 불구하고, 혹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 때문에 서로를 이어 줄 거라고 믿었다.(137)

루시는 그들이 둘 다 피억압자의 위치에 있음을, 타자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루시는 하층 계급의 여성이기 때문에, 유세프는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모로코인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타자성을 공유할 뿐, 타자화되는 방식은 다르다. 소수자성이라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절대적 소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소수자라고 해서 언제나 추구하는 방향이 일치하지도 않는다. 만약 소수자성의 공유가 무조건적 연대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루시는 앨리스를 불행한 결혼생활로부터 구제하고 유세프를 도와 모로코와 탕헤르의 독립에 기여했어야 했다. 소설의 결말을 보면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음을, 따라서 소수자 간의 연대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선의, 의지, 윤리적 양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루시는 앨리스를 구해주는 백마 탄 기사가 아니다. 불행하고 기만적인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는 점만 보면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상 루시 또한 앨리스를 억압하는 존재이다. 앨리스의 대학시절 과거 회상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둘의 관계는 평범한 우정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칠 뿐만 아니라 기괴한 측면도 있다. 루시는 앨리스를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가지기 위해 아주 정석적으로 앨리스를 가스라이팅 해왔다. 여기에는 루시와 앨리스가 동성인 것도, 둘의 관계가 퀴어적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존이 부유하고 고분고분 순종적인 아내 앨리스를 원하는 것처럼, 루시는 "내가 사랑에 빠졌던 예전의, 고유의, 오래된 앨리스"(187)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절대적 소수자성이 없는 것처럼, 불변하는 본질적인 정체성이라는 것도 허상일 뿐이다. 절대적 소수자성을 주장하는 행위가 또 다른 소수자에 대한 억압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듯이 절대적 정체성에 대한 집착 또한 마찬가지이다. 루시가 앨리스를 존으로부터 구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변명일 뿐이며, 결국 루시와 존 모두 앨리스를 자신들의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며 그를 억압하고 있다.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 호기심이 일어 문득 찾아본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탄제린』이 고딕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앤 래드클리프의 『이탈리아인』(The Italian)이나 『우돌포의 비밀』(The Mysteries of Udolpho),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의 『몽크』(The Monk) 등으로 대표되는 고딕 소설은 주로 여주인공이 성이나 수도원 같은 중세의 분위기가 풍기는 장소에 갇혀 공포를 느낀다는 특징을 가진다. 베닝턴 대학의 제닝스홀이 고전적인 고딕 소설에 나올법한 장소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떠올라 이 또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잠깐 스쳐 지나가는 공간 제닝스홀 이외에도, 생각해보면 이 소설에는 고딕 소설적인 특징이 많이 숨어있다. 앨리스는 탕헤르에 온 이후로 거의 스스로를 집에 감금하다시피 한다. 고딕 소설을 상징하는 감정적 미학은 경이로움, 공포,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 무언가가 더 숨어있을 것 같은 모호한 느낌, 그리고 (극도의 공포에서 비롯되기도 하는) 숭고함인데, 이 또한 소설 곳곳에서 나타난다. 앨리스는 시종일관 불안함과 공포에 시달린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도시 탕헤르,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속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탕헤르의 의인화 같은 루시의 강렬한 존재감, 그리고 그런 루시와의 어두운 과거가 그를 뒤흔든다. 고전적인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들 모두 정상성을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기묘함, 기괴함, 불편함, 꺼림칙함, 더 나아가 공포와 숭고함과 유사한 감정까지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고딕 소설로 본다면, 앨리스를 가둬둔 억압자는 누구일까? 존일까? 루시일까? 소설의 결말을 보면 누가 더 교활한 억압자였는지 답이 나온듯하다. 처음에는 이 결말이 제일 아쉬웠다. 너무 일방적이고 특별한 변수 없이 직선적이며, 앨리스가 결국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데에 비해 루시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된 게 평면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훑으며, 이 결말을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 장을 읽고 소설의 프롤로그로 돌아오면 루시가 완벽한 승리자처럼 보인다. 그는 자유로워지고, 앨리스는 가장 두려워하던 운명을 맞는다. 스스로를 잃은 채 정신병원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정말 루시는 이기고 앨리스는 진 것일까? 루시가 가장 원했던 것은 앨리스와 함께하는 인생이었다. 루시는 결국 혼자 떠난다. 그것도 루시 메이슨으로서가 아니라, 앨리스 시플리로서. 루시는 앨리스의 재산과 이름을 가지고, 앨리스의 억양을 흉내 내며 앨리스가 된 듯 그 자리를 빼앗는다. 하지만 그는 결코 앨리스가 될 수는 없다. 앨리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듯이, 루시도 결국 루시 메이슨으로서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루시는 이후에 루시 메이슨으로서 풍족하고 충만하며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까?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생각해볼거리가 많은 엔딩이라고 결론 내렸다.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있다. 앨리스, 루시, 유세프와 같은 복합적인 특성을 가진 인물들이나 탕헤르라는 독특한 배경을 활용하여 더 풍부한 의미를 담은 결말을 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이런 개인적인 감상은 차치하고, 몰입해서 단숨에 읽을 수 있는 긴장감 있는 페이지터너를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탄제린』의 가장 큰 강점은, 뭐니 뭐니 해도 '재밌다'는 거니까. 

이전 07화 #06 사랑의 역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