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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n Oct 24. 2021

#08 재즈

음악을 통한 시간과 공간의 교차

  마지막 책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이런저런 책을 고려하다가 마음을 내려놓고 토니 모리슨의 『재즈』를 골랐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일깨우려고 쓰기 시작한 글인데, 어떻게 토니 모리슨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원래도 책을 좋아했지만, 문학과 완전히 사랑에 빠져 어떻게든 책과 관련된 길을 평생 걷고 싶다고 생각하게 한 작가가 모리슨인데. 그가 집필한 열한 권의 책 중에서도 『재즈』를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그 어느 작품보다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을 내려놓고서야 『재즈』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리슨과 그의 책에 관해서라면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정말 너무나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을 총체적으로 다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주 짧고 함축적으로 딱 한 가지 주제만 다루어보고자 한다.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나 배경은 간단한 검색으로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고 하면 논문 한 편을 써야 할 것이어서, 따로 기승전결이 없는 다소 퉁명스러운 글이 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책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재즈』가 아니어도 그의 소설을 한 권은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고.

토니 모리슨, 『재즈』, 최인자 옮김, 문학동네(2015).

  『재즈』를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방식이었다. 인물들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뀌는 계절과 시간이 어떻게 도시의 공간들과 만나는지. 이 시간들과 공간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음악이라는 점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음악은 어떤 식으로 소설에 등장하는가? 먼저 소설의 형식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모리슨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쓴다. "나는 구조가 의미를 향상시키도록 설계된 소설들을 써왔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구조가 의미와 동등할 것이다" (359). 실제로, 이 소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 자체가 음악과도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즈 음악과. 바이올렛, 조, 앨리스, 도 카스를 포함한 소설의 인물들은 각각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로 이 음악에 참여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변주된 멜로디들이 재즈 음악을 만들어내듯, 서로에게 긴밀하게 연결된 채 음색과 방향을 바꾸어가며 연속적으로 흘러간다. 작가의 구체적 언어 사용도 재즈 음악을 연상시킨다. 예컨대, 단어와 구절들이 문장 사이의 연결고리처럼 반복되고, 문장의 길이도 매우 짧았다가, 끝도 없이 말이 이어지며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길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 여자는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덤불 속에서 움직였던 것이 나뭇가지가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빛이 너무 희미해 바지에 난 구멍으로 튀어나온 자기 무릎조차 볼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그가 그 표시를 놓쳤을 수도 있었다. 그 표시를 보았다면 그의 마음은 기쁨과 수치심으로 뒤섞였겠지만, 최소한 그 이후부터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1925년 가을까지 그가 마음속에 줄곧 간직하고 살아온 텅 빈 공허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64-5) 

이러한 언어의 사용은 이런저런 코드를 연주해보고 이윽고 더 긴 하나의 멜로디를 지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재즈 뮤지션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음악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뿐만 아니라, 이야기 내에서도 볼 수 있다. 음악은 특정 공간의 상태, 환경, 조건을 바꾼다. 

  저 위, 도시의 한 구역, 사람들이 이 도시에 온 이유인 그곳에서는, 문가에서 휘파람으로 부는 딱 어울리는 곡조만으로 혹은 레코드판의 둥근 홈을 타고 들려오는 흥겨운 노래만으로 도시의 기후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 얼어죽을 것 같은 추위를 뜨거운 열기로,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는 서늘함으로.(86)

더 흥미로운 점은, 음악이 몸을 위한 공간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말로 할 수 있는 주장은 이미 깃발에 인쇄되어, 독립선언문에 나온 몇 가지 약속들을 되풀이하며, 기수의 머리 위로 휘날렸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는 북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1917년 7월이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은 냉정하고 무표정했으며, 북소리가 그들을 위해 만들어주는 공간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87-8)

시위하는 흑인들은 피프스 애비뉴를 행진하고 북을 치면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간 또한 창조하고 있다. 피프스 애비뉴는 앨리스에게 가장 두려운 곳이었다. "거기서는 백인이 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손에 쥔 접은 지폐를 흔들어 보이곤 했다. 또 점원들은 마치 그녀가 그들이 그녀에게 너그러이 팔기로 한 물건의 일부라도 되는 양 그녀를 함부로 만졌다"(88).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어도 스스로를 말할 수 없어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북소리가 대신 해주었기에. 그들 자신의 눈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목격한 광경들을 북소리가 대신 그려주었기에. 그 고통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마침내 공포는 사라졌다"(89). 앨리스는 피프스 애비뉴를 이제야 또렷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앨리스와 밀러 자매는 흑인들의 음악에는 부정적이다. 그들은 "그런 음악은 진짜 음악이 아니라 흑인이 만들어낸 시시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96). "앨리스는 그 천박한 음악이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죽은 이백 명의 흑인을 추모하며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 피프스 애비뉴를 조용하게 행진하던 흑인 남녀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92-3).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내는 음악은 아무 음악이 아니라 (아마도 재즈나 블루스일) 흑인들의 음악인 것이다. 앨리스가 그 음악에 대해 가장 싫어했던 점은 "그 음악의 욕망", "무절제한 굶주림"이었다(96). 그 '천박한' 강렬함이 도시를 바꾸고 공간을 바꾸고, 심지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은 모르고.

  흑인들의 음악에 의해 바뀌고 새로 창조된 공간은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아픔도 있으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음악과 공간은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애도되지 않았던, 애도될 수 없었던 이백 명의 죽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 동등한 사람으로, 살아있는 생명체로도 존중받지 못했던 흑인들, 그들의 몸, 마음, 삶이 다른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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