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카페에 종종 오는 대머리 남성이 있다. 대머리 아저씨라고 쓰려다 나 자신도 아저씨인 것에 흠칫 놀라 남성이라고 고쳐 쓴다. 그러고 보면 20대 초반의 어린애들을 군대에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인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싶다.
나는 그 대머리 남성이 싫었다. 왠지 모르게 싫었다. 상냥하지 않은 그의 눈빛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고도 해보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마음속으로는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뉴요커인 내 모습을 그리지만 실제로는 영락없는 아저씨인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점점 숱이 줄어들고 가늘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의 지금 모습이 멀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이란 생각이 들어 더욱 싫었다. 말로는 대머리가 돼도 괜찮다고 몇 년 전부터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데 불행한 이들을 보면 싫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답답한 마음에 화가 나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불행을 자초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고, 위만 올려다보며 과거의 후회를 놓지 못하고, 오지 않은 미래의 불안을 떠안고 살아가는 것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결국 나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과 닮은 못난 내 모습이 싫고 화가 났던 것이다.
말한대로, 글을 쓴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수시로 불행을 선택하는 이런 내 모습이 참 우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희망을 품는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라는 말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뼈아픈 실패들을 숱하게 경험한 인생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지우고 싶지 않다. 시련과 고난이 있었기에 일상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오늘의 내가 있다고 믿는다. 때때로 바닥을 치지만 나 자신을 오래도록 미워하지 않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 역시 내가 지내온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누구 하나 응원하는 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 자신만은 나를 끝까지 응원하고 격려하기로 다시금 마음 먹어본다.